'빛의걸음걸이'에 해당되는 글 477건

  1. 2024.02.11 [바튼 아카데미]
  2. 2024.02.11 [플랜 75]
  3. 2024.02.06 [넥스트 골 윈즈]
  4. 2024.02.06 [추락의 해부]
  5. 2024.02.06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6. 2024.02.06 [웡카]
  7. 2024.02.06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8. 2024.02.06 [두 세계 사이에서]
  9. 2024.02.06 [도그맨]
  10. 2024.02.05 [사랑은 낙엽을 타고]
빛의걸음걸이2024. 2. 11. 22:44

 

 

1970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둔 바튼 아카데미는 들뜬 분위기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휴가를 떠나고 적막해진 학교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기숙사를 떠날 수 없는 학생 몇과 이들을 책임질 고대문명사 선생 폴 허넘, 급식매니저 메리와 경비 대니가 남았다. 바튼의 졸업생이자 고지식한 교사 허넘은 나름의 프로그램을 마련하는데, 그나마 하나둘 떠나고 반항아 앵거스 털리만이 홀로 남겨진다.  

그리고 펼쳐지는 깐깐한 교사와 문제 학생의 대결과 반목, 이해와 화해라는 클리셰에 바튼 졸업생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아들을 둔 급식 매니저 램의 존재감, 학교를 벗어난 두 번의 짧고 긴 외유를 더하며 영화는 조금씩 서사를 확장한다. 영화가 시작될 때 등장하는 타이틀 텍스트와 디자인부터 영화 전반에 흐르는 포크음악까지 ‘우리 복고풍이야’ 선언한 듯한 작품이어서, 당대를 기억하는 미국 성인 관객이라면 꽤 향수에 젖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나는 한국 관객이므로 탈락.  

배경과 인물과 주요 서사 등에서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영화여서 큰 기대는 없었는데, 캐릭터들의 개성과 디테일한 설정을 통해 상처받은 외강내유의 인물들과 관계의 변화를 적당한 온도와 거리감으로 그려낸 점이 괜찮았다. 남겨졌다가 보스톤으로 떠나는 한국계 학생 예준 캐릭터가 이채로워 ‘1970년 미국 사립학교에 한국계 학생?’ 싶었고, 아카데미 노미네이트의 다양성 요건을 위한 설정이겠지 싶었지만, 미국 영화 속 인종적 다양성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것일 테고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한 변화일 수 있겠다 싶기도 했다. 메리와 아들을 통해 시대의 아픔까지 과하지 않게 담아낸 점도, 누락됐다면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부분을 환기시켜주는 느낌이었다.   

이미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존재하고 수십 년 동안 적지 않은 영화를 본 자로서, 이제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보면서 그 어떤 작품에서도 느끼지 못한 새로움과 독보적인 감동을 경험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그럼에도 이런 휴머니즘 가득한 드라마를 만드는 감독과 제작진의 고충도 엄청 클 거라는 주제 넘는 생각, 한편으론 텐트폴 무비가 장악하는 산업의 한 귀퉁이에서 이런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있다는 게 고맙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간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깊이 남은 작품들은 예전 영화들인데, 그렇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이 영화는 내가 느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감동을 선사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말이다. 부국제 때 눈여겨보다가 놓쳤는데, 본 걸로 만족이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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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11. 21:21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방금 사건이 일어난 듯 어지러운 공간, 관객이 그 현장을 걷는 것처럼 눈높이와 움직임을 맞춘 카메라가 조심스럽게 구석구석 훑으며 나아간다. 이어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서 긍지를 느끼는 일본 전통을 언급하는 독백과 사건 용의자인 장총을 든 청년의 자살, 고요하고 강렬한 인트로는 노인혐오 범죄 관련 뉴스 멘트로 마무리된다.  

미치는 비슷한 연배의 동료들과 함께 숙박업소의 룸 어텐던트로 일한다. 70대 중반의 고령이지만 가족 없이 혼자이기에 생활을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 힘에 부치는 일일 수 있지만 아직은 체력이 받쳐주고 세월과 더불어 쌓인 연륜도 있다. 동료들은 일과 중 나누는 점심은 물론 여가 시간에도 함께 어울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계, 그중 최고 연장자인 이네코는 집에도 왕래하며 가까이 지내는 친밀한 사이다. 

국가는 얼마 전부터 ‘플랜75’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 중이다. 실업과 경제 위기가 고질화되면서 노인을 사회적 비용으로 치부하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7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안락사를 진행하는 공공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플랜75 신청자에게는 어떤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는 10만 엔의 지원금이 지급되고, 시신의 공동 처리에 동의하면 무료 장례를 치러준다. 콜센터에서는 신청 후 예정일 직전까지 주 1회 15분의 전화 돌봄 서비스가 지원되어 외로운 일상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케어해준다. 

히로무는 플랜75 센터의 말단 스태프다. 제도가 궁금해 찾아온 이들을 상담하고, 공공장소의 가판 행사에 나가 무료급식을 제공하며 플랜75를 홍보한다. 대대적인 캠페인처럼 진행되는 가판 행사장에는 ‘주민등록 없어도 신청 가능’ 따위의 배너가 세워져 있고, 삶이 괴로운 이들에게 깔끔한 죽음을 권하는 국가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노인과 늙은 노숙인 등 사회가 불필요하다고 잠정적으로 판단한 이들에게, 플랜75는 히로무처럼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청년의 얼굴로 다가간다.   

필리핀 출신의 간병인 마리아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의 수술비 마련이 시급하다. 이주노동자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사정을 전해들은 관계자가 모금으로 도움을 주고, 얼마 후 시설보다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 마리아는 플랜75 센터에서 안락사 당한 이들의 유품을 분류하는 일에 투입된다. 2인 1조의 작업 분위기는 무겁고 조금 전 세상을 뜬 이들의 마지막 소지품을 정리하는 일도 가끔 나오는 고가의 시계나 물품을 눈치껏 챙기는 동료와 시선을 교환하는 일도 착잡하다.   

가성비 좋은 상품을 안내하듯 플랜75를 설명하고 성실하게 신청자를 모집하던 히로무는 센터를 찾아온, 오랫 동안 만난 적 없는 삼촌을 알아본다. 매뉴얼에 따라 담당자에서 배제되지만 삼촌의 집으로 찾아가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히로무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고 안락사된 시신이 폐기물업체를 통해 처리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면서 혼란에 휩싸인다.  

그사이 미치는 일자리를 잃었다. 동료 이네코가 일터에서 쓰러진 후, 숙박업소에서는 손님들이 보기 불편해한다는 이유로 고령의 룸 어텐던트들을 모두 해고했다. 고령의 미치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따금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던 이네코에게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간 집에서는 식탁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시신을 발견했다. 마침 살고 있는 집도 비워줘야 할 처지가 되자 미치는 수순처럼 플랜75를 선택한다.   

플랜75 콜센터의 상담사 요코는 미치의 담당자다. 주 1회 집으로 전화를 걸어 대화를 나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어느새 마음을 연 미치는 통화를 하며 잊고 지냈던 과거와 지난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곤 한다. 편안한 분위기의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15분으로 정해진 통화의 종료 알림음이 울리면 현실이 환기된다. 플랜75의 마지막 서비스는 건조한 일상으로 이어온 삶을 마감하려는 마음에 적잖은 울림을 남기고, 미치는 용기 내어 과거 추억이 깃든 볼링장에서의 만남을 요코에게 청한다.  

콜센터 노동자인 요코에게 플랜75 신청자와의 통화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신입을 교육하는 팀장은 통화를 하며 신청자의 마음이 바뀌지 않도록 유도하라는 팁을 전달하고, 규정을 어기고 미치와 만나 따뜻한 시간을 보낸 후 생겨난 심란함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미치의 안락사 전날 밤, 복받치는 감정을 숨기고 담담한 척 통화를 마친 요코는 끝내 눈물을 쏟는다. 마음의 채비를 마친 듯 통화가 끝난 후 전화기 코드를 뽑아 정리한 미치에게, 요코가 다급하게 거는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진공 상태처럼 느껴지는 플랜75 안락사 병동은 국가가 강권한 삶의 최후를 선택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에게, 마지막 평온을 선사하듯 고요하고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는 히로무와 삼촌은 말이 없고, 안내에 따라 동요 없이 침대에 누운 미치의 얼굴은 무표정하다. 약물이 투여되는 사이 고개를 돌리면, 옆 침대의 주인공이 보인다. 삼촌은 미동 없이 절차에 따라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옅은 경고음에 이은 직원들의 대화, 시간이 흘렀지만 의식이 살아 있는 미치는 무언가의 오작동으로 죽음에 실패했다.  

삼촌을 보낸 후 갈등하던 히로무는 안락사 병동으로 찾아가 삼촌의 시신과 마주한다. 삼촌의 선택을 막을 수 없었지만 시신이 폐기물로 처리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히로무는 어렵사리 시신을 빼돌린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마리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옮기는 일을 돕고, 히로무는 생전에 그랬던 대로 조수석에 삼촌을 앉히고 긴박하게 화장장을 수배하기 시작한다. 환생이라도 한 듯 병동에서 나와 돌아온 세상에서, 외진 길을 걸어 미치가 닿은 곳에서는 애잔하게 아름다운 석양의 하늘이 펼쳐진다.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상황만을 제시하고 그와 관련한 인물의 생각이나 의견, 선택의 이유 등을 생략하거나 최소한으로 보여주며 전개되는 영화였다. 플랜75를 중심으로 교차되는 주요 인물들의 상징성을 부각하며 디테일을 과감히 건너뛰는 데도 전체적인 서사를 밀고 나가는 데에 무리가 없었고, 세련되고 유려한 편집이 자연스러움을 더했다. 초반 이네코가 쓰러진 후 미치 등이 일 그만둘 때, 콜센터 팀장의 신입 조언을 곁으로 들으며 혼자 밥 먹던 요코가 고개를 들 때의 정면샷은 관객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묻는 듯했다.  

노인, 빈곤, 죽음, 안락사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가난한 노인을 안락사하는 제도 운용이 가능한 디스토피아를 영화는 과잉 없이 보여준다. 누구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온갖 공간에서 홍보되는 플랜75는 공기처럼 사회를 장악하며 죽음의 기류를 확장한다. 섬세한 운용과 작동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인 빈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별개의 현상을 당위적인 인과관계로 왜곡하는 제도는 저항의 기력을 잃은 가난한 노인을 겨냥하며 모두의 인간성 또한 잠식해간다.  

동료들과 일하고 노래하고, 조카와 반주를 곁들여 식사하는 모습 어디에서도 죽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노인들 그리고 가난한 노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정책이 마련한 일자리에서 마음을 다해 성실하고 친절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회초년생 청년들의 대비는 섬뜩했고 현실적인 박진감이 무겁고 두렵게 느껴졌다. 이미 돈이 전부라는 가치관이 팽배한 세상에서 만약 그런 제도가 입안되고 지속된다면 그 속에서 성장하는 어린이나 젊은이 역시 자신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울 테고 결국 돈이 없으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상식이 되고 말 것 같다.  

부국제 때 놓쳤는데, 설 연휴 부모님 댁에 머물던 서울에서 시간이 맞아 볼 수 있었다. 소개를 통해 내용을 대략 알고 있던 터여서 고령인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며 마음이 복잡하기도 했는데, 영화 마지막에 대상 연령을 65세로 낮추는 걸 검토한다는 뉴스 멘트를 생각하면 나이 들어가는 누구에게도 무관한 문제가 아닐 것 같다. 깊이 생각한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로 안락사나 조력 자살에 찬성하는 편인데, 경제적 생산성을 잃은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인식의 결과로서 이런 미래가 닥친다면 인류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겠다 싶어 소름이 끼쳤다. 너무 잘 만든 영화의 무서움을 느꼈다. 


2/10 cgv신촌아트레온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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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걸음걸이2024. 2. 6. 20:20

 

 

영화의 배경이었던 덕에 아메리칸사모아를 처음 알았다. 폴리네시아 중심부인 하와이와 뉴질랜드 사이의 사모아제도 중에 서쪽 지역은 독일과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다가 1962년에 독립해 사모아라는 국가가 되었고, 동쪽 지역은 현재도 미국령으로 아메리칸사모아라 불린다고 한다. 200㎢의 땅에 57,000명가량이 살아간다는데 감이 안 와서 찾아보니, 240.2㎢의 통영보다 조금 작은 면적에 절반쯤의 인구가 살아가는 곳이다.  

아메리칸사모아가 영화의 배경이 된 이유는 2001년 월드컵 예선 호주전에서의 31:0 패배 때문이다. FIFA 랭킹 최하위에 쉽게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을 보유하고 만 아메리칸사모아 대표팀의 이후 목표는 오로지 한 골, 2011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선수단은 딱 봐도 오합지졸인데 엉망인 경기 중 쉬는 시간에 대기실에 모인 그들에게 대표팀 감독은 이제부터 심한 말을 하겠다며 누가 들어도 심하지 않은 “Bad!”를 연발한다.  

즈음 미국에서는 퇴출 위기에 놓인 토마스 론겐이 구단 관계자들과의 면담 끝에 아메리칸사모아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는다. 2014년 월드컵을 준비하며 새로운 국대 감독을 선임한 아메리칸사모아, 공항에 도착한 론겐을 tv프로그램 “비행기를 타고 온 사람” 카메라가 맞이하고 촬영 감독은 또 축구협회 관계자고 뭐 그렇다. 아메리칸사모아 국대 선수들 역시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며 축구도 하고 있고, 대표팀은 중요하지만 누구 하나 축구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것이 그곳의 현실이다.  
 
이후 전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포츠 영화의 정석을 비껴가지 않지만, 간결한 설정과 짧은 대사를 통한 상황의 고유성과 캐릭터의 개성이 잘 드러나고 전반적으로 과하지 않은 톤이어서 오글거림 없이 볼 수 있었다. 평생 가볼 일 없을 아메리칸사모아의 시원한 풍광과 아직은 문명에 찌들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이 주는 여유로움 역시 좋았다. 개인적으로 축구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보니 낯선 배경과 사람들이 발산하는 청량감이 좋았고 축구 외적인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흥이 더 크게 와 닿았던 것 같다. 

실제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요 캐릭터들의 개성과 사연도 나름 매력적인 요소였다. 인성 논란 전력의 이혼남인 토마스 론겐 감독은 자기중심적이고 괴팍하지만 남모르는 아픔과 인간미가 있다. 아메리칸사모아에 도착해 안부 전화 대신 딸의 음성메시지를 반복해 듣는 모습이 의아했는데, 하나뿐인 딸은 몇 년 전 이미 세상을 뜬 상태다. 동상이몽의 국대팀이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에이스 선수 ‘파파피네’ 자이야의 존재는 극적이었고 그와 함께하는 공동체의 자연스러운 태도는 감동적이라는 느낌을 덧붙이는 게 이상할 정도지만 감동적이었다.   

부산에 갔으니 쾌적한 art2관에서 한 편은 봐야겠다는 욕심으로 찾아보다가 선택한 영화였다. 참 좋았던 [조조 래빗]을 떠올리고 기대했는데 그에 비하면 꽤 헐렁하게 느껴졌고 장르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스포츠 소재 ‘감동 실화’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지는 못한 작품인 것 같다. 그래도 ‘펠레 마라도나 론겐’ 같은 위트 넘치는 대사가 기억에 남고, 마지막에 보여주는 미국 cbs의 해설자 론겐 감독, FIFA 평등 앰배서더 자이야, 40대로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흑역사의 골키퍼 니키 살라푸 등 주요 인물들의 현재는 흥미로웠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도 영화 시작과 마지막 쿠키에 발랄하게 등장하는데, 그건 그냥 그랬다.  


2/1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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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9:19

 

 

유명작가 산드라가 살고 있는 시골집에 한 대학생이 인터뷰를 위해 찾아온다. 여유롭게 시작된 인터뷰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중단된다. 다음을 기약하고 대학생이 떠난 후,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 다니엘은 안내견 스눕과 함께 산책에 나선다. 이들이 산책에서 돌아온 집 앞에는 아빠 사뮈엘이 피 흘린 채 쓰러져 있고, 목격자 없이 추락한 사뮈엘의 사망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다. 

도입부에서 주요 사건의 전모를 드러낸 영화는 추락사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과거와 각자의 비밀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남편의 추락과 사망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산드라는 변호사 뱅상을 선임해 재판을 준비한다. 알리바이와 무죄 증명을 위해 뱅상과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니엘이 사고로 시각을 잃은 후 부부 사이에 일기 시작한 균열과 도시를 떠나 남편의 고향으로 이사한 후에도 악화되기만 한 관계다. 

작가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산드라와 달리 지지부진한 가운데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사한 집의 수리에 매진하던 사뮈엘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는 것으로 자신의 스트레스를 달래고 표출해왔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마찬가지였고, 같은 집 안 각자의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며 남처럼 생활하던 부부는 생사가 갈린 채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놓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모두의 시선은 산드라에게 쏠린다. 검사는 다양한 증인을 소환하고 증거를 수집해 집요하게 산드라를 공격한다.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과거와 사생활과 성적 지향 혹은 일탈 등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사건 직전 있었던 부부싸움의 녹취파일이 발견되면서 산드라는 궁지에 몰린다. 아동 보호와 재판의 객관성을 위해 법원에서 직원이 파견되지만,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으로 충격 받은 다니엘에게도 이러한 사실은 거의 여과 없이 전달된다. 

시종일관 관객의 긴장과 몰입을 놓치지 않는 영화는 차가운 집과 뜨거운 법원을 오가며, 법정 공방이라는 진실게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맥락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현상과 이면에 늘 존재하는 간극과 누구에게나 유효한 자기만의 진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 잠재된 엄청난 빈틈과 논리적 추론으로 파고들 때 생겨나는 수많은 함정, 발언권을 가진 자가 가정과 추측을 밀어붙일 때 발생하는 확신의 오류와 그 반복이 타자에게 미치는 영향, 재판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필요 이상의 가혹함과 잔인함 같은 것들.  

이 모든 지난함과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증언해야 하는 불리한 룰을 뚫고 산드라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어떻게”로 알 수 없으면 “왜”라는 다니엘의 마지막 증인 진술 그리고 “남 돌보는 거에 지치고 피곤할 때 됐어”라며 스눕에 투사해 자신의 내면을 토로했던 사뮈엘의 상황 등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극적 연출 없이 무죄를 보여준 영화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저녁 식사와 축하주를 나누는 자리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를 숨기지 않는다. 산드라 캐릭터의 독특성일 수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모종의 암시일 수도, 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민감하게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법정에서의 선명한 결말에도 영화는 법리적 판결과 별개로 남을 수밖에 없는 진실의 문제를 지우지 않는다. 표절과 외도에 대한 사뮈엘의 주장이 회복 불가능한 갈등에서 깊어진 피해의식과 질투에 기인한 것이라도 무의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뮈엘의 강박을 냉철하고 자신만만한 산드라가 황당한 억측이자 자기연민으로 무시했대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다니엘에게 산드라는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엄마이자 미지의 괴물로 그림자를 남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두 줄로 요약 가능한 사건에서 여러 갈래의 생각을 끌어내는 영화였는데, 냉담하고 침착하면서도 비밀스러운 여운을 남기는 주인공 산드라 휠러의 정제된 연기 덕이 컸던 것 같다. 나오는 줄 몰랐는데 [신의 은총으로]에서 인상적으로 보았던 스완 아를로드, 변호사 뱅상의 존재가 반가웠다. 하나의 사건을 향한 여럿의 관점이 경합하는 가운데 현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조망하며 질문을 던지고,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서늘한 진실을 환기하는 작품이었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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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8:18

 

 

근대적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그 시대 복장을 한 하인과 나체의 여인과 한 공간에 있는 제인 버킨의 모습이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것 같다. 런던에서 서른을 맞던 날을 회상하는 인터뷰의 배경이기도 한데, 같은 장소에서 역할과 포즈가 바뀌고 마흔의 생일을 앞둔 제인 버킨의 인터뷰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미장센은 마네의 “올랭피아” 패러디였는데, 추앙되지만 함부로 취급되는 여성과 그 극단에 선 여성 스타의 이미지 그리고 직관적으로 보이는 것과 사실 혹은 실제의 차이를 복합적으로 상징하는 선택일까 싶었다.   

영화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내용과 형식으로 제인 버킨의 다양한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낸다. 다큐와 인터뷰, 일부 흑백을 포함한 극영화의 여러 시퀀스와 에피소드, 신화와 예술 작품에서 차용한 상징적인 이미지화, 감독과의 대화와 메이킹까지 아우르는 장면들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연쇄와 전환 속에는 제인 버킨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아녜스 바르다의 욕망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 제인 버킨의 유명인이고 싶지만 무명인이고도 싶은 욕망이 교차한다. 감독은 어떤 힌트처럼 아드리아네의 실타래를 화면에 던져둔 것 같았지만 보면서 솔직히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무지에 기인한 감상이겠지만 당황스럽거나 조잡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몰입이 어려웠고 후반부에 타잔과 제인, 잔 다르크로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는 실소와 함께 졌다는 마음이 됐다. 제인이라면 타잔의 제인보다 다른 제인이라며 그를 언급하고 그에 따른 영상이 나오고, 잔 다르크를 언급하며 자신의 프랑스어 억양 때문에 어렵겠지만 마지막 장면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말에 이어 조야한 화형 장면 연출되는 부분이 특히 압권이었다. 어린 소년과의 로맨스 로망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감독의 어린 아들이 언급되는 부분도 약간 놀라웠는데, 찾아보니 이 부분은 이후에 두 사람이 출연한 영화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영화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과 연결된 이미지나 인물만이 아니라 결혼과 아이들 등 실제 인생사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 남편 세르주 갱스부르와의 노래 녹음과 후의 공연 장면 등도 등장한다. 촬영 기간은 알 수 없지만 1988년에 발표된 영화라고 하니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중년의 길목에 막 들어선 제인 버킨의 ‘공적’ 삶의 시간을 아녜스 바르다의 주관적 시선으로 망라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캐릭터와 분장과 의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얼굴 표정과 연기를 펼치는 제인 버킨은 매력적이었지만 그의 전성기를 동시대인으로 지켜본 적 없는 자로서는 사실 좀 불감당이었다.  

제인과의 대화를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고 의미를 얻는 이야기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대체로 산만하고 장황한 느낌이 지배적이었다. 감독은 하고 싶은 거 다한 것 같고, 관객은 그리스 신화와 서양 미술, 영화 역사에 대한 지식 및 감독의 예술관에 대한 선이해를 갖춰야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나이 먹으면서 사람 생각하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런 영화를 만나면 예술가의 사유를 따라가는 건 역시 어렵구나, 멈칫하게 된다. 오전 10시 10분 영화를 보는 건 게으른 자로서 나름 큰 결심과 시도였건만, 내게도 작품에도 아쉬웠다.  



2/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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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5:15

 

 

엄청난 개방감의 인트로 덕에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함께 기분이 들떴다. 세상 핫한 티모시 샬라메의 노래와 춤을 보며 행복했고, 세상 다정하고 달콤한 거 다 모아서 펼치는 판타지도 그런대로 매력적이었다. 아름다운 웡카의 현현에도 불구하고 살짝 지루해질 즈음 등장해 빵 터지게 만든 움파룸파 - 휴 그랜트 덕분에 세월을 느꼈고, 초콜릿연합 카르텔의 심장이었던 미스터빈의 존재감도 인상적이었다. 

오래 전이지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나름 재미있게 봤었는데 로알드 달의 원작 내용 자체를 몰라서인지 프리퀄인지 뭔지도 모르겠더라만, 남녀노소 막론하게 즐겁게 볼 수 있게 신경 쓴 웰메이드 영화 같았다. 그래픽과 소품, 음악 모두 매력적이었고, “푸어”에 경기하는 부자 등 세심한 조연 캐릭터 구축과 나름의 개연성을 갖춘 스토리라인도 괜찮았다. 영화의 감동을 통해, 엄마가 남긴 초콜릿의 비밀은 함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깨달음 그리고 “좋은 것은 모두 꿈에서 시작됐단다”라는 다정한 전언을 마음에 새기고 성장할 수 있는 어린이라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들었다.   

4dx 영화 관람은 처음이었는데 기대만큼 다이내믹한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화면과 동시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괜찮았지만, 스크린 앞 연기와 양쪽 벽면의 발광 효과는 영화의 특수효과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조야해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차라리 아이맥스로 볼 걸 그랬나 싶지만, 4dx는 그냥 이렇게 한 번 경험해본 걸로 안녕. 티모시 샬라메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번에도 변함없었다. 티모시는 참 좋겠다, 티모시라서.  


1/31 cgv서면 4dx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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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4:41

 

 

1920년대 초반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 동네 청년들이 모여 시끌벅적하게 헐링 경기를 벌이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경기를 마치고 몇몇 청년들이 몰려간 시네드의 집으로 얼마 후 영국 주둔군들이 들이닥친다. 불법집회 운운하며 청년들을 벽으로 몰아세우고 한 명씩 이름을 말하라고 위협하던 영국군들은, 입을 떼지 않는 열일곱 소년 미하일을 닭장으로 끌고 가 죽인다.  

이유 불문의 일방적인 폭력과 살인은 영국군들이 주둔하는 아일랜드 마을에서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비극은 영국이 지배하는 아일랜드에서 일상의 한 부분이고, 청년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저항의 이유다. 청년 무리에 있던 데미언은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영국의 병원에 자리를 얻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영국으로 떠나기 위해 나섰던 데미언은 기차역에서도 무장한 영국군들의 폭력을 목도하고 발길을 돌린다. 

영국행을 포기하고 돌아온 데미언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단체 IRA에 가입한다. 동네 청년 대부분이 단원이고 부모 없이 자란 데미언의 친형 테드는 지역 조직의 리더 격이다. 낮에는 각자의 일을 하고 동네 펍에서 당구를 치는 평범한 청년들은 밤이 되면 영국군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에 모여 열악한 무기로 훈련하고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영국군에게 타격을 입히기 위해 싸운다.  

얼핏 고요해 보이는 마을에 잠복한 긴장과 위험은 느닷없는 돌발 사태와 무력 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주둔군 숙소를 공격해 무기를 탈취한 청년들이 체포되고 테드는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한다. 수감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데미언과 댄 등 단원들은 아버지가 아일랜드인이라며, 감옥문을 열어준 영국군 쟈니 로건과 함께 탈주에 성공한다. 투쟁이 가속화되고, 위장한 일상을 탈피한 단원들은 파르티잔으로 변모한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IRA의 저항과 영국군의 폭압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영국 지배에 협력하는 부유층의 밀고와 동지의 배신이 드러나고, 그들을 직접 처단하는 데미언의 내면은 점차 냉정하고 단단해진다. 배신한 단원의 무덤 자리를 안내하는 데미언에게, 오랜 이웃인 그의 엄마는 너를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내적 갈등과 슬픔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선 데미언을 흔들지 못한다. 연인인 시네드를 고문하고 집을 불태우며 동지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영국군의 만행은, 독립을 향한 데미언의 신념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1922년 12월,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지역의 자치를 인정하는 평화 협정이 발표된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수립되고 영국군은 철수하지만, 목숨을 걸고 함께 싸웠던 이들은 찬반 입장으로 분열한다. 치열한 토론에도 양측의 입장은 좁혀지지 않는다. 조약을 수용한 테드는 자유국 군인이 되어 새로운 질서 수립을 위한 활동에 앞장선다. 허울뿐인 자치령과 함께했던 투쟁의 목적을 저버리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는 데미언과 댄, 시네드 등은 완전한 독립을 위한 싸움을 택한다.  

평화 협정이 남긴 상흔은 영국군과 싸울 때보다 더 복잡한 갈등으로 이어지고, 독립 전쟁은 내전으로 탈바꿈한다. 저항 활동에 매진하던 데미언은 체포되고 전향을 거부하자 처형될 위기에 놓인다. 영국군에게 잡혀 수감되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영국군의 자리를 동지였던 자유국 군인이 대신한다. 과거에 단원들을 구해줬던 쟈니 로건은 죽었고, 적진에 선 형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끝내 신념을 고수한 데미언은 시네드가 건넸던 정표와 편지를 남기고, 테드의 발사 구호를 마지막으로 처형된다. 


영화는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와 1922년의 평화 협정이라는 역사적 배경 위에서 함께 싸우던 형과 동생이 극단의 입장으로 치닫는 비극을 그려낸다. 작은 마을을 중심으로 비교적 간략한 서사로 전개되는 영화는, 스펙터클과 영웅 캐릭터를 배제한 연출로 강점된 지역의 민중들이 겪는 다중의 고통과 투쟁의 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전쟁과 권력의 이면, 이데올로기와 삶의 의미를 환기한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싸움에는 얼마나 많은 변수와 양상이 동반되는지, 신념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인접한 강대국의 강제 점령이라는 유사한 현대사를 가진 한국인의 입장에서, 영화에서는 얼핏 의미 없는 죽음처럼 보이기도 하는 데미언의 최후에 대해 숙고하게도 됐다.  

오래 전 영화를 뒤늦게 보았지만, 켄 로치 감독이 영국인이라는 점에도 새삼 생각이 미쳤다. 20세기 북아일랜드 분쟁은 1998년 평화 협정으로 종식되었다고 하니, 데미언과 테드가 겪은 갈등과 비극은 지난 세기 막바지까지 이어진 셈이다. 평화 협정이 체결된 지 10년이 안 된 시점에 어쩌면 오랜 전쟁의 원인 제공자격인 영국 출신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라니. 이런 소재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켄 로치 감독이 견지해온 일관성이 작품에 진정성을 더했겠지만 아일랜드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싶기도 했다. 국적과 인물을 동일시하는 인식에 함정이 있다는 건 알지만, 만약 일본인 감독이 일제강점기 조선의 독립 투쟁과 광복 이후 국내 좌우 진영의 대립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면 어쩐지 달갑지 않을 것 같으니 말이다. 

[나의 올드 오크] 개봉과 켄 로치 특별전 덕분에, 예전에 놓친 영화를 한 편이라도 볼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언젠가 dvd도 사뒀지만 극장에서 보는 건 차원이 다르니까. 접근성 문제만 없었다면 좋았던 [지미스홀]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아쉽기는 하다. 약 20년 후 오펜하이머가 되는 데미언 역의 킬리언 머피는 반가웠고, 대부분 모르는 배우들이었지만 주요 역할을 맡은 이들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걸 알고 약간 감동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억양의 변별성 같은 실용적인 이유만은 아닌 캐스팅일 것 같아서 말이다. 킬리언 머피의 존재감을 빼면 흐른 세월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고, 묵직하게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1/3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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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4:14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리안은 파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캉으로 왔다. 작가인 그는 정체를 숨기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삶과 노동을 경험하고 생생한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려 한다. 고용센터에서 상담을 기다리던 그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온다. 화가 잔뜩 난 강단 있어 보이는 여성은, 고용센터 담당자의 잘못된 서류 처리를 따지러 왔지만 미리 예약하지 않은 탓에 제지당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실업수당을 받지 못하면 아이들은 어떡하냐는 절박한 항의는 절차에 밀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부로 살다가 이혼 후 청소 일을 구하는 중년 여성으로 위장한 마리안의 이력서는 비어 있다. 상담사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장점을 추가해 이력서를 수정한 마리안은 고용박람회 부스를 기웃거리다 세드릭을 알게 된다. 점심을 청하는 세드릭을 따라 그의 집에 가서 피자를 먹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캉에서의 첫 인연을 만든다. 청소 일을 지망하는 이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마리안은 2인 1조로 현장에 투입된다. 어디든 일은 급하게 진행되고 깐깐한 관리자들은 노동자들을 무시하며 마리안은 아직 서툴다.  

적당한 동료의식과 친절을 갖춘 노동자들 속으로 마리안은 조금씩 침투해간다. 캉을 떠나고 싶은 어린 마릴루, 피자 트럭 사업을 꿈꾸는 세드릭, 세 아이의 싱글맘 크리스텔 등 마리안이 관계를 맺는 이들은 모두 가난하지만 그래서 허세 없이 어울리고 서로를 존중하며 자주 웃음을 보인다. 친목 모임으로 함께 볼링을 치고 나온 주차장에 서서, 볼링장의 비싼 음료 대신 집에서 챙겨온 모히또를 나눠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정겹다. 각자 꿈꾸는 미래가 있고 현실은 버겁지만, 삶의 무게는 이미 그런 일상에 적응된 이들을 완전히 압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용센터와 교육장, 볼링장에서 거듭 마주치며 안면을 튼 크리스텔이 궁금해진 마리안은 위스트르앙 항구 여객선 청소에 지원한다. 하루 세 번 영국을 오가는 여객선이 정박하는 짧은 시간 동안 배에 올라 전투적으로 청소를 하고 빠지는 일이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먼 길을 걸어 출근하는 크리스텔에게 카풀을 제안한 마리안은 출퇴근을 함께하며 그와 서서히 가까워진다.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며 크리스텔의 집에서 커피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과 더불어 해변의 여유를 즐기기도 하면서, 마리안의 마음속에는 그를 속이고 있다는 불편함이 조금씩 자라난다.  

마릴루, 크리스텔과 함께 여객선에 오른 어느 날, 청소 후 객실에 두고 온 마릴루의 점퍼를 찾으러 갔다가 세 사람은 하선하지 못한다. 꼼짝없이 영국까지 가야 하는 상황에서 비어 있는 1등석 객실에 숨어들고, 야릇한 해방감에 젖은 세 사람은 샴페인을 마시고 진심의 대화를 나눈다. 나이도 처지도 다르지만 함께 일하며 피어난 신뢰와 우정이 적당한 취기와 함께 폭발해 1년에 한 번 이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잠시 후 크리스텔과 함께 선창으로 나가는 마리안을 알아본, 여객선 탑승객 지인이 건넨 몇 마디로 마리안이 감춰온 진실이 밝혀진다. 

1년 후 파리의 한 서점에서 열린 북 토크 객석에는 마리안이 캉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마리안과 잠깐씩 인연을 맺었던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 나온 사실이 흔쾌하고, 마리안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작가로서 그들에게 받은 도움에 감사한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서점 밖을 서성이던 마릴루를 발견한 마리안이 그와 함께 도착한 위스트르앙 항구에는 크리스텔이 기다리고 있다. 1년 전 함께였던 그곳에서 여전히 청소 일을 하고 있는 크리스텔과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마주 선 마리안의 대비는 선명하다. 


시작부터 줄곧 깔리는 마리안의 내레이션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전개됨에 따라 관객에게 조금씩 고조되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크리스텔과 가까워지면서 은연중에 나오는 마리안의 본래 언행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거리감과 문화적 격차 표현 그리고 카풀로 가까워진 크리스텔이 잠시 혼자인 차 안에서 마리안의 지갑을 뒤지는 장면 - 정체 발각과 크리스텔의 절도를 동시에 의심하는 마리안의 내면 - 그렇게 알아낸 마리안의 생일을 축하하는 크리스텔의 깜짝 파티와 네잎클로버 목걸이 선물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마리안에 이입하며 영화를 따라가는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가 가진 선입견과 편견, 그가 느끼는 낯섦과 생소함에 공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영화는 막바지까지 이어지는 마리안의 이중적 존재감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영리하게 비껴가면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한다. 마리안에게 이웃의 차를 빌려주는 지인, 여객선 청소 현장의 스타이자 트렌스젠더인 쥐스틴 캐릭터와 이별 파티, 혼돈의 현장을 엄격히 지휘하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관리자 나데주 등 잠시 등장하는 인물과 에피소드 덕분에 풍성한 박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는 세계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진실을 가리는 일이 온당한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지만, 청소 후 빠져나가지 못한 여객선 일등석에서의 시간과 약속과 두 사람이 느꼈을 배신감 그리고 북토크에 모인 사람들과 나누는 마리안의 우아한 웃음 사이의 간극은 자명하다. 1년 후에도 여전히 차고 있는 네잎클로버 목걸이에도 불구하고, 동질감을 확인하고팠을 크리스텔의 마지막 제안을 거절하는 마리안의 선택은 냉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마릴루와 크리스텔이 받았을 깊은 상처가 마음에 걸렸지만 엔딩을 판타지로 만들지 않은 점은 좋았다. 각자의 삶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 파생된, 결국 치유될 수 없는 상처는 영화가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시놉시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한다는 것만 확인하고 큰 기대 없이 선택한 영화였는데, 참 좋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많지 않은 수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임에도 극적 효과를 위한 작위적인 요소가 없었다. 서사 전개에 있어 부드러운 생략과 분위기 전환이 편안했고, 감각적이고 세련된 연출력이 몰입감을 더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영화의 원제인 [위스트르앙 부두]라는 르포르타주가 2010년에 한국에도 출간됐던데, 그 책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라면 나중에 한 번 봐도 좋겠다 싶다. 경제 위기와 비정규직 파견 노동은 이미 익숙해진 현실이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시의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준 영화였다. 


1/31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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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6. 11:11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 오는 밤, 달리는 트럭을 멈춰 세운 경찰들이 운전석에 총구를 겨눈다. 짙은 화장에 핏자국이 어린 얼굴, 어깨가 드러난 드레스를 입은 남성 그리고 트럭 뒷문이 열리자 보이는 수많은 개들. 전후 사정을 알 수 없는 급박한 상황으로 시작된 영화는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더글라스와 그를 인터뷰하는 정신과의사 에블린의 대화를 따라가며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미국 뉴저지주 교외에서 성장한 소년 더글라스의 어린 시절은 폭력과 학대로 점철됐다. 집 앞 개장에 가둔 개들을 굶겨서 투견으로 돈을 버는 아버지는 공포 그 자체인 광신도였고, 형은 그런 아버지의 편에서 개들을 불쌍히 여기는 더글라스를 궁지로 모는 적극적인 동조자였다. 더글러스는 옛 노래를 lp로 틀어놓고 요리하던 엄마 곁에서 잠깐의 안온함에 젖어들곤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오면 불안한 평화는 금세 깨졌다.  

굶주린 개들에게 몰래 먹이를 준 더글러스를 고자질한 형과 그에 광분한 아버지는 더글러스를 개장에 가둬버리고, 저항할 수도 더 이상 견딜 수도 없는 임신한 엄마는 몰래 먹을 걸 넣어주고 집을 떠난다. 불쌍히 여겼던 개들과 다를 바 없이 갇히고 굶주린 더글러스는 개들과 남다른 교감을 하게 되고, 어느 날 분노한 아버지가 쏜 총에 맞지만 극적으로 구출되어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수감된 아버지는 2주 만에 감옥에서 자살하고, 모범수로 복역하고 8년 만에 출소한 형은 개들의 복수로 거리에서 죽음을 맞는다. 

총격으로 하반신 불구가 된 더글러스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생활하던 중 보호시설에 방문하는 연극 교사의 권유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오르고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며, 어쩌면 난생처음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나름의 사랑을 시작한다. 본격적인 연기에 도전하기 위해 멀리 떠난 선생님의 흔적을 좇으며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의 기사들을 스크랩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공부와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나름의 노력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한 선생님의 무대를 찾아가지만, 더글러스가 확인하는 것은 일방적인 짝사랑의 초라함이다. 게다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인 그에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오롯이 혼자인 세계에서 그가 의지하고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는 개들뿐, 더글러스는 뉴저지의 유기견 보호소에서 일하며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개들과의 교감을 통해 살아가기 시작한다. 몇 년 후 지원금이 점차 줄어들던 보호소에는 폐쇄 명령이 내려지고 더글러스는 개들과 함께 폐교에 새롭게 둥지를 튼다. 

수많은 개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돈이 필요한 더글러스에게 일자리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연히 발견한 드랙바의 오디션을 통해 무대에 서게 되지만, 이는 기회이자 위기로 작용한다. 어린 시절 학대와 차별의 기억을 안고 성인이 된 후 고립과 소외의 삶을 살아가는 더글러스에게 사회는 부조리와 불평등이 가득한 곳이다. 깊은 교감과 정교한 실행의 상호작용이 가능한 개들과 함께 남몰래 벌여온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절도 행각은, 이를 추적한 경찰이 드랙바를 찾음으로써 발각된다. 더욱 결정적인 사건은 그가 단골인 빨래방 마사의 부탁으로 지역 폭력조직과 갈등을 빚으며 벌어졌지만 말이다. 


영화는 더글러스의 생애를 조각조각 편집해 잇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서사만 놓고 봤을 때 다소 신파스럽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을 영화는, 짙은 분장과 화려한 복장의 드랙퀸 비주얼이나 얼핏 사이보그 같은 느낌을 주는 휠체어 등 강렬하고 기묘한 더글러스의 이미지를 통해 상쇄하고자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느낌이지만 개들과 교감하는 더글러스가 행복하게 보이지만은 않았기에, 일평생 인간 사회에서 배제된 채 살아온 그의 다른 존재로 거듭나고자 하는 욕망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려나 영화에서 마지막 액션 씬 못지않게 힘을 준 부분은 더글러스가 드랙퀸으로서 처음 무대에 서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린 시절 엄마와 함께 듣던 올드 팝과 보호시설에서 경험했던 연극 덕분에 얻은 기회라는 점에서, 좌절되었지만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의 유산이 더글러스에게 선사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한편으론 몸에 새기면 무엇이든 훗날의 자산이 된다는 인생의 교훈을 뜬금없이 확인하는 느낌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칼렙 랜드리 존스가 직접 노래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긴장과 불안으로 경직된 상태에서의 연기는 엄청 났고, 중성적인 음색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영화 시작과 함께 “불행이 있는 곳마다, 신은 개를 보낸다. - 라마르틴” 자막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프랑스에서는 익히 알려진 문구인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개의 구원’을 믿지 못하는 관객을 향한 일종의 주문을 겸하는 거였을까 싶기도 하다. 견줄 데 없을 만큼 불행한 더글러스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의중을 알고 행동하는 개들. 배우도 개들도 훌륭한 연기였기 때문에 영화를 볼 때는 어느 정도 몰입은 됐지만, 마지막에 혼자 먼저 감동한 에블린 때문에 좀 민망했다. 교회 앞 광장으로 걸어가는 더글러스의 “준비됐습니다”의 여운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실은 엔딩에 깔린 곡,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이 개인적으로는 많이 아쉬웠다. 영화 [라 비앙 로즈]를 보며 이 노래가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알게 된 후에는 꼭 희화화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예능에서 마구잡이로 쓰이는 게 안타깝게 느껴졌는데, 한편 그 효과에 이미 익숙해지기도 한 터라 연출적으로 의도했을 비장함과 장중함이 반감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쓰고 보니, 영화에 푹 빠져서 봤더라면 느끼지 않았을 아쉬움 같기도 하다.  

개도 뤽 베송도 크게 관심이 없지만 영화를 보러 간 건 [타인의 친절]을 보고 기억하게 된 칼렙 랜드리 존스 때문이었다. 되는 것 없이 안쓰러워 마음이 갔던 [타인의 친절]의 제프처럼 비사회적이지만, 독립적이고 나름 진취적인 인물이어선지 포스터나 영화 이미지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벌크업된 근육질이어서 좀 놀랐다. 이 캐릭터 덕분에 증량한 거라면 다시 내가 처음 봤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고, 몇 년 전 부국제에서 보고 싶었지만 놓쳤던 [니트람]이 올해는 꼭 개봉했으면 좋겠다.  


1/30 cgv거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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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빛의걸음걸이2024. 2. 5. 15:15

 


홀리파는 건설 노동자다. 물처럼 술을 마시며 일하고, 캐비닛과 침대뿐인 현장 숙소에서 기거하는 그는 불금이 와도 설레지 않는다. 무뚝뚝하고 심드렁한 그와 달리 활기와 허세가 넘치는 성격의 동료 가라오케 씨의 강권으로 라이브 바를 찾은 어느 날, 홀리파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온다. 

안사는 마트 노동자다. 피곤이 역력한 안색으로 보안 노동자의 감시를 무시하며 일하고 돌아온 집은 참 소박하다. 소파 겸 침대, 그 옆의 스탠드, 식탁 겸 책상, 그 위의 라디오, 작은 싱크대와 그 위의 오븐 정도가 가구와 가재도구의 전부처럼 보이는 단출한 살림이다. 동료와 함께 라이브 바를 찾은 어느 날, 한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느 날처럼 일하다 마신 술이 책임자에게 발각되어 홀리파는 해고당했다. 유통기한을 넘긴 빵을 가방에 챙겼다가 보안 노동자에게 걸려 안사도 해고당했다. 낡은 자루가방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하는 짐을 가라오케 씨에게 맡기고 나온 홀리파는 길에서 잠을 청하고, 함께 잘린 의리의 동료들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마트를 뒤로 한 안사는 당장 일자리 구하기에 나선다. 
 
우연히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덤덤한 호감을 공유하며 함께 영화를 본다. 다음을 기약하며 전한 안사의 전화번호 쪽지는 홀리파의 손에서 거리로 흩날리고, 두 사람의 팍팍한 일상에 희미하게 점등됐던 그린라이트가 위태로워진다. 홀리파는 다른 현장에 일을 구하고 싸구려 숙소에 묵으며, 안사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인터넷카페에서 찾은 구인 광고를 보고 찾아간, 아마도 마약 거래 온상인 술집 주방에서 일을 시작한 안사의 마음 한 편에도 연락 없는 홀리파가 자리한다. 

둘은 극적으로 재회한다. 1인분의 살림으로 살아가는 안사는 홀리파를 집으로 초대하고 식기와 커트러리를 하나씩 더 구입한다. 로맨틱한 데이트를 위해 홀리파는 숙소 이웃이 흔쾌히 건넨 재킷을 빌려 입고 안사의 집을 방문한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이제야 서로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알콜 중독인 홀리파와 알콜 중독으로 가족을 잃은 안사는 연락이 끊긴 동안의 안타까움이 무색한 간극만을 확인하고 만다. 

냉랭하게 헤어진 후 안사는 길에서 만난 안락사 위기의 개를 입양해 함께하지만, 잠시 마음을 흔들었던 홀리파의 자리는 그대로다. 아무래도 안사를 잊기 어려운 홀리파는 어느 밤 전화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안사에게 향하다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시 연락 두절, 그러나 가라오케 씨 덕에 사고 소식을 알게 된 안사와 홀리파는 결국 다시 만난다. 절절한 가슴앓이도 뜨거운 고백도 눈물도 웃음도 없지만 묘하게 납득되는, 가난한 중년의 사랑이다. 


영화에는 두 버전의 배경음이 흐른다. 라디오를 켤 때마다 흘러나오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민간인 사망 소식을 알리는 뉴스 멘트 그리고 다양한 감정과 일상의 디테일을 담은 가사의 노래들. 말수가 적은 주인공들의 대사보다 끊임없이 흐르는 노래들은 더 많은 것을 전달한다. 라디오 뉴스의 주파수를 돌리면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팝, 가라오케 씨를 포함한 라이브 바 아마추어들의 옛 노래, 강렬하고 펑키한 밴드의 락 넘버까지 오롯한 존재감을 발하는 노래들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풍성한 요소다. 
  
근래 본 영화 중 가장 적은 수의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고 가장 낡고 퇴락한 공간들이 배경이 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의상이 거의 바뀌지 않는 인물들은 최소한의 살림살이로 살아가며 감정 표현도 표정 변화도 최소한을 유지한다. 주인공들의 내면을 동기화한 듯 이어지는 노래들 중 “슬픔 속에서 태어나 환멸에 갇혀 살았”다는 가사가 기억에 남았는데, 사실 안사와 홀리파는 그조차 초월한 느낌을 주기도 해서 이상하게 부럽기도 했다. 

미니멀한 아날로그 세계에 bgm처럼 흐르는 전쟁 소식과 함께 전쟁 같은 일상을 견디는 북유럽 노동계급 남녀의 이야기가 내게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건조하지만 감각적인 톤을 기본으로 간간이 내뿜는 쿨한 과장과 블랙 유머였다. 우회하는 듯 직진하는 감정에 담아 덤덤하게 내뱉는 진심이 구구절절하지 않아 좋았고, 음악 외의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정제된 느낌이어서 신선하기도 했다. 심지어 러닝타임마저 81분에 불과하니, 은퇴를 번복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감독은 주인공들만큼이나 경지에 오른 모양이다. 
 
독보적인 리듬감의 이름,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처음 만난 건 오래 전 영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의 가다]를 통해서였다. 영화잡지나 책에서 활자로만 접했던 감독과 제목의 영화들이 필요 이상의 아우라를 걸치고 개봉하던 1990년대 중반,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예술영화들을 약간은 ‘영접’하듯 보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인지한 상태에서 처음 접하는 북유럽 영화였을 텐데, 어떤 에피소드나 장면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후 감독의 작품을 본 적이 없음에도 이 영화가 기다려졌던 건, 서대문에 살던 시절 방에 붙여놓았던 포스터 때문이기도 하다.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배우들의 이미지와 함께 쉽지 않은 감독의 이름이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이케아와 오로라로 대표되는 북유럽 감성과 로망의 허를 찌르듯, 내내 누추하고 삭막한 헬싱키를 배경으로 이어질 듯 말 듯한 인연을 따라가던 영화의 마지막 뒷모습이 산뜻하고 좋았다. 마침내 사랑이 시작되는 것인지 긴가민가했던 이 모든 과정이 사랑인지 알 수 없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진 것 없고 나이 들고 비루한 이들의 ‘사랑’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안사 역의 알마 포위스티가 영화 [토베 얀손]의 주인공 배우였다는 걸 알게 된 것도 뒤늦게 반가웠다. 


1/4 cgv서면 art2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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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