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노트2019. 9. 9. 15:43

 

 

[의사 요한]이 끝났다. 두 달 동안 다음 회를 기다리고 집중해 보면서 설레고 새삼 반하기도 하면서 행복했던 드라마다.

이제 거의 습관적으로 드라마를 본다. 한때는 텔레비전 없이도 살았는데 언젠가부터 집에 있으면 늘 텔레비전을 틀어놓는다. 별로 마음 터놓을 일 없이 그냥 일하며 살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누구랑 무슨 이야기들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나 궁금한 마음에 드라마를 보기 시작한 것 같다. 통속적이고 뻔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그게 사람 사는 거고, 그러나 혼자 나이를 먹어가며 살다 보면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복작복작한 관계들과 사건들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것이라는 걸, 혼자서 꾸리고 채워가는 일상에서는 그런 외부의 ‘사람’과 ‘사건’들을 차용하면서 어쩌면 학습된 ‘사람 사는 거’라는 걸 실감한다.

노안이 오면서 활자를 볼 때 눈이 불편해지니 더욱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그런 대리경험을 받아들이고, 한편으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스스로를 한심해하고, 언젠가 읽었던.. 한류드라마에 푹 빠져 dvd를 쌓아놓고 소파에 누워 보다가 목이 돌아가 병원을 갔다던가 하는 사노 요코의 말년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배우 지성을 ‘발견’했고, 그에 대해 뒤늦게 이것저것 찾아보며 열광했다. 그의 연기를 긴 호흡으로 본 건 처음이다. 예전, 어렴풋한 단편의 기억으로 검색해 제목을 찾아낸 [로열 패밀리]라는 드라마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고도를 기다리며]의 장광설처럼 긴 대사를 쏟아내는 그를 우연히 본 기억이 있다. 무관심하던 배우였는데 좀 놀랐고 각인이 되었지만 그뿐, 이후 [킬미 힐미]의 몇 장면을 우연히 보다가 작가가 탤런트들 괴롭히려고 쓴 드라만가 생각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다. 

고작 그 정도의 기억과 이미지가 다였던 배우 지성을 [의사 요한]에서 ‘나 홀로 재발견’했고, 지난 영상들을 통해 그가 연기를 시작해 ‘갓지성’이라 불리는 배우가 되기까지 또 그 사이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해 두 아이의 아빠가 되기까지의 알려진 사연들을 알게 됐다. 보여지는 직업인이고 알려지는 유사 공인이니, 내가 알게된 것들은 물론 철저히 선별되고 연출된 것이겠으나.. 결국 품절된 [킬미 힐미] 스페셜dvd세트를 중고로 사놓고 뿌듯했다. 

[의사 요한]의 핵심 키워드는 ‘존엄사’ ‘마취통증의학과’ ‘천재 의사’ 정도가 되겠지만, 그를 통해 더 진하게 전해지는 건 사람 사이의 공감과 이해, 고통과 사랑 같은 거였다. 물론 이런 덕목들은 모든 이야기의 기본이자 궁극이겠지만. 사실 차요한은 인물이라기보다 하나의 이상형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이든 환자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불문하고 자신보다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사람, 자신의 고통과 불이익이나 피해는 당연한 듯 감내하면서도 타인의 부족함이나 잘못은 모른 체하거나 그대로 수용하는 사람,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심각한 질병을 비밀스럽게 떠안은 채 누구보다 치열하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사람, 처음 삶을 꿈꾸게 만들어준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죽음일지 미래일지 알 수 없는 길을 떠나고야 마는 사람.

의사로서만이 아니라 극중 인간 차요한이 가진 극강의 외유내강성은 현실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100의 어둠과 초조 속에 홀로, 100의 여유와 치열함으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놀라운 캐릭터, 그래서 그런 역할을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며 그냥 ‘차요한’으로 느껴지는 배우 지성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상대역으로 함께 연기하며 그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의 눈과 마음을 투영해준 이세영도 무척 사랑스러웠고,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본 정민아, 황희 등 마취통증의학과 의사 역할의 젊은 배우들의 생동감 있는 연기도 매력적이었다. 

암튼 재미있게 본 드라마 [의사 요한]이, 한창 전개 중일 때의 텐션에 비하면 꽤나 잔잔하게 끝났다. “시청자 여러분, 이제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라고 말해주듯이. 기억하고 싶은 대사들이 많았고, 고통과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느슨한 일상의 내게도 각인하고 싶은 순간들을 여러 번 선사해준 드라마였다. 각본집과 ost음반과 dvd가 나왔으면 좋겠고, 벅찬 순간들을 기억하며 나도 좀은 열심히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 요한], 고마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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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