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김영하 작가의 글에서, 휴대폰을 얼마나 오래 안 볼 수 있나 내기를 하는 세계 최고 갑부들의 게임이라던가 뭐 그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평소에 물건을 지닐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 어떤 연락도 직접 받을 필요가 없는 자가 진정 부와 권력의 최정점에 있다는 뭐 그런 방향의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언젠가부터 어떤 이야기도 구체적인 디테일이 아닌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느낌으로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말 그런 이야기였는지는 약간 자신이 없지만.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1년 남짓 전부터 나도 미련하게 안고 살던 많은 것들을 열심히 처분하고 있다. 부와 권력은 나와 상관없지만 어쨌거나, 너무 많은 짐들이 부담스럽고 가볍게 살고싶다는 좀은 간절한 바람이 생겼고, 마침 그럴 수 있는 상황도 만났기 때문에.
시작은 작년 여름, 교통사고를 당해 오목교 건너에 있는 병원으로 통원치료를 다녀야 하는데 잔뜩 쫄아든 마음과 불편한 다리로 걸어가는 건 엄두가 안 나고 고작 한두 정거장을 왕복하며 버스요금을 들이는 건 너무 아까웠다. 그런 진심이 통했는지 마침, 마일리지 정산 시 20%를 가산해주는 이벤트를 하는 예스24 중고서점이 오목교역에 있었고 병원에 갈 때마다 수십 권씩 책을 짊어지고 버스를 타고 가서 팔았다. 목표도 있었다, 중고로 나온 비틀즈 리마스터드 박스세트. 통원치료 다니는 동안 열심히 책을 팔아 모은 마일리지로 마침내 갖게 되었고, 비어가는 책장만큼 마음도 좀 가벼워졌다. 이후로 읽고 싶어 산 책은 서둘러 읽고 알라딘중고서점에서 좋은 가격일 때 다시 파는 게 루틴이 됐다. 어차피 늘 빠듯한 가계이다 보니 이래저래 도움도 많이 된다.
오늘은 집에 와서 두어 시간, 판매할 씨디들을 70장이나 챙겼다. 9월에 팔겠지 싶었던 부산국제영화제 예매권 판매가 8월 29일이어서 계산하며 사용한 카드값이 초과됐고, 현금서비스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서 씨디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예전에도 가끔 씨디를 팔았다. 책이며 씨디는 죽을 때까지 짊어지며 살다 갈 거라고, 따로 생각할 일도 없이 그냥 함께하는 정물들이었는데 돈이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소중한 걸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제법 비장한 결의로 안타까움을 달래며 실천하던 일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되는데, 이제는 책을 팔고 씨디를 파는 일이 단지 환금성의 관점에서만 이익이 아니라 미련하게 이고 지고 살던 것들과의 고리를 끊고 조금은 가벼워지는 어떤 기회라고도 느껴진다. 계획대로 된다면 머지 않은 미래에 서울을 떠날 때, 실용적 기능 전혀 없는 짐들을 줄여 좀 더 가볍게 움직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 책이든 씨디든 비디오테이프든, 결국 물건일 뿐이고 기억이니 추억이니 잔뜩 의미를 갖다붙여봤자 한 순간 집중의 대상은 하나일 뿐이라는 걸 되새기며 그런 삶에 아주 조금 가까워진다는 상쾌함.
겹쳐진 단 두 장의 셔츠로, 어쩌면 유일한 사랑의 기억을 나눠가졌던 친구를 기억하는 절박한 간소함이 못내 부러웠던 [브로크백 마운틴]을 갖다대는 건 좀 뻔뻔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없애고 처분하다 보면, 언젠가 내게도 그런 날이 올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