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1. 7. 18. 13:40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카페에서 이어폰을 나눠 꽂고 음악을 함께 듣기 시작한 커플을 보며, 다른 테이블의 남자와 또 다른 테이블의 여자가 '저건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각자의 상대에게 한다. 음악의 사운드는 서라운드이고 믹싱 과정에서 오른쪽과 왼쪽의 소리는 섬세하게 조절되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음악을 함께 듣는다고 생각해 하나의 이어폰을 나눠 꽂고 듣는 것은 사실상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이라는 것. 열을 올리던 둘은 커플에게 알려주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주변의 기척에 서로를 알아보고 멈칫,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2020년의 무기와 키누, 의외의 장소에서 마주친 그들은 머지 않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각자의 파트너와 나누는 서로의 이야기에도 한 귀를 열어둔다. 그리고 영화는 그들이 만나 함께하기 시작한 2016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문학과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고 라멘집 도장깨기에 열중하며 미라 특별전 소식에 가슴이 설레는 키누, 취미 삼아 그리는 그림이 밥벌이가 되기를 바라고 우연히 찍힌 로드뷰 속 자신의 모습을 기적이라고 온 주변에 자랑하며 밥을 사는 엉뚱한 무기는 어느 날 같은 시각 지하철 막차를 놓친다. 개찰구 앞에 망연히 남겨진 이들과 함께 첫차를 기다리는 펍에서, 무기는 건너 테이블에 앉은 오시이 마모루를 발견하고 흥분하지만 마주한 두 남녀는 자신들만의 대화를 나누다 먼저 사라졌다. 오시이 마모루를 알아봤지만 낯가림 때문인지 잠자코 있었던 키누는 헤어지기 전 무기에게 그 말을 건네고, 둘은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간다. 미처 몰랐지만 같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던 둘은 겹치는 좋아하는 작가를, 영화티켓을 책갈피로 쓰는 습관을, 얼마 전 예매해놓고 가지 못한 같은 공연의 티켓을 확인하며 놀랍고 신기하다.


평소 호감을 가졌던 이성과의 합석을 마다한 무기와 잠시 토라졌던 마음을 금세 풀어버린 키누는 귀가길 심부름으로 산 1+1 화장실휴지 더미를 나눠들고서,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해 무기의 집으로 향한다. 무기의 책들을 보며 내 책장 같다고 느낀 키누는 무기가 좋아하는 가스탱크들을 촬영한 긴 영화의 첫 관객이 되고, 겨우 선 길이를 맞춘 헤어드라이어로 키누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고 정성껏 주먹밥을 구워 함께 먹는 무기의 마음도 설렌다. 깨끗하고 무구하게 함께 보낸 하룻밤은 둘에게 미처 존재를 몰랐던 또다른 자신을 만난 듯, 감수성과 취향의 소울메이트를 발견한 벅찬 기쁨을 선사했다. 이른 아침 1+1 화장실휴지를 나눠 들고 함께 나선 귀가와 배웅, 닫히는 버스 유리문 사이로 미라 특별전을 다음 약속으로 잡은 둘에게는 한 더미씩의 화장실휴지가 남겨졌다.


화장실휴지 더미를 들고 외박 후 귀가한 키누는 가족들의 잔소리를 피해 2층 자기방으로 올라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간직하고 싶은, 하룻밤 사이 벌어진 꿈 같은 현실에 피곤한 몸 위로 마음이 붕 떠버리는 듯한 비현실감이 키누에게서 느껴진다. 미라 특별전을 함께 보고 찾은 카페에서도 둘의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른다. 좋아하는 음악을 이야기하며 이어폰을 나눠 꽂은 그들의 옆 자리, 믹싱 엔지니어는 하나의 이어폰으로 나눠 듣는 음악이 각자에게 다른 음악이 되는 이유에 대해 한 시간이나 일장연설을 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나 같고 이야기가 너무나 잘 통하는 두 사람, 함께 있지 않을 때 서로를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세 번째 만남에서는 고백을 하겠다는 결심까지 같은 둘은 연인이 된다. 헤어지는 밤, 초록불이 들어오지 않는 버튼식 신호등에서 키스를 한 무기와 키누의 연애는 급속도로 진전되고 어느 날 무기의 집에서 사랑을 나누고 며칠씩 침대에서 나오지 않으며 함께하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이 많이도 겹치는 둘, 이제 가장 좋아하는 대상이 서로가 된 무기와 키누의 연애는 달달하고 행복하다. 부모의 등쌀에 잔뜩 불편한 복장으로 면접에 갔다가 마음의 상처를 입은 키누에게, 전화기 너머 묻어나는 눈물을 감지하고 슬리퍼 바람으로 전철을 타고 달려가는 무기는 세상 든든한 연인이다. 무기는 키누와 함께하는 지속가능한 일상을 원한다. 역에서 걸으면 8분 만에 닿는 무기의 좁은 집에서 소꿉장난 같은 동거를 시작한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에서 30분을 걸어야 하는 집으로 이사를 한다. 조금 낡았지만 넓은 베란다가 있고 그 앞에는 시원한 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집이다. 웹툰을 그리는 무기와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알바를 하는 키누가 역에서 만나 집으로 함께 걸어오는 30분은 더없이 적당한 산책길이다. 집 근처에는 노부부의 맛있는 빵집이 있고, 새해 첫 산책에서 만난 버려진 고양이도 식구가 되었다.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데다 함께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아늑한 집에서 둘은 행복하다. 


취업이라는 '어른의 세상'을 중요시하는 키누의 부모님이 왔다 가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무기의 아버지는 알바나 하며 도쿄에 살기를 고집하는 아들의 생활비 지원을 중단한다. 키누는 내키지 않는 회계 자격증을 따 취업을 하고, 나름 기댈 언덕이었던 웹툰의 컷당 가격을 후려침 당하며 세상의 벽을 느낀 무기 역시 1년 여의 노력 끝에 물류 회사에 취직한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어엿한' 직업인이 된 두 사람 사이의 밀도와 온도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일과 삶을 분리하며 직장 생활을 하는 키누에게 좋아하는 것들은 현재진행형이지만, 6시 칼퇴 보장이라던 입사 때의 이야기와 달리 야근이 빈번하고 일이 많은 회사 생활에 무기의 심신은 금세 휘말려들어간다. 무기는 늦은 퇴근 후 집에서도 일에 골몰하고 함께 즐기던 게임과 만화와 소설과 영화는 키누만의 것으로 남았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된 두 사람 사이를 침묵이 채우기 시작하고, 서로를 배려한다는 명목의 보이지 않는 벽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커플문신을 했던 무기의 선배 예술가 커플은 헤어졌지만, 키누를 마음에 들어했던 여자친구는 지인으로 남았다. 단지 생계를 위한 직장 생활과 변해가는 무기와의 동거에 공허함을 느끼던 키누는 그녀의 소개로 이벤트 회사 사장을 만나고 이직을 결정한다. 사장 카지는 무려 오다기리 죠이므로, 이직하지 아니할 이유가 없겠지만, 아무튼 그 역시 무기와 키누와의 벌어진 거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얼마 후 무기의 선배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다.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행하기도 했던 그의 죽음에 대한 키누와 무기의 마음은 조금 다르다. 경주마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일에만 매달리던 무기의 심경은 더욱 복잡했을 것이나, 함께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도 그 다음 날도 둘 사이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얼마 후, 공동의 지인이 결혼하는 날을 앞두고 둘은 각자 마음을 먹는다. 이 사이는 무얼까, 친구일까 연인일까 고민하며 고백하는 날을 마음먹었을 때와 다름없이, 참 잘 통했던 둘은 이별하는 날 역시 이심전심이다.


결혼식은 행복해보였다. 웃음 가득한 얼굴의 충실한 하객이었던 두 사람은 착잡하다. 결혼식 하객다운 멋진 착장으로 각자 같은 답례품 종이백을 든 두 사람은, 복잡한 심경을 뒤로한 채 대관람차를 타고 노래방에도 간다. 벅찬 마음을 고백했던 카페에 닿아, 다른 이들이 차지한 그들이 늘 앉던 자리 대신 낯선 자리를 잡은 둘. 서로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지 뻔히 알면서도, 무기는 여전히 키누와 함께하는 삶을 놓치고 싶지 않다.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지지고 볶기도 하며 그저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언젠가 어느덧 상대로 인해 자신의 삶이 채워졌고 흘러왔다는 안온한 행복을 느끼는 인생을 바란다. 눈에 고이는 물기를 감추지 않은 채 착잡한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너머, '그들의 자리'에 같은 신발을 신은 풋풋한 커플이 들어와 앉는다. 둘만의 세상에서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막 사랑이 시작될 때 무기와 키누가 나누었던 바로 그것이다. (굳이 이렇게까지 길게 들려줄 일인가 싶어 개인적으로는 에러라고 느껴졌지만 아무려나) 불과 4년 만에 너무나 변해버린 감정과 관계,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회한을 참지 못하고 키누는 자리를 뜬다.


그들은 헤어졌다. 그야말로 순한 맛 멜로답게, 크게 언성 높이는 일 한 번 없이 동고동락한 착한 캐릭터들답게, 그들이 진짜 헤어지기까지는 3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키누가 살 집을 구하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함께 살면서도, 4년간 축적된 연인의 감정을 다시 피워올리는 일 없이 이별의 과정을 충실히 밟아간 모양이다. 각자의 짐을 나누고 나눌 수 없는 고양이는 보가 바위를 이긴다는 걸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가위바위보를 통해 결정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카페에서 하나의 이어폰으로 음악을 나눠듣는 커플을 보며, 언젠가 믹싱 엔지니어의 일장연설로 알게 된 사실을 상기했고 그 이야기를 함께 들었던 서로를 마주쳐버렸다. 비슷한 시각에 카페를 나선 그들이 어설픈 안부를 나누거나 눈길을 주고받는 일은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카페문을 나서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다른 방향을 향하며, 서로의 파트너가 눈치 챌 일 없이 등 뒤로 한 팔을 올려 흔드는 인사로 끝. 그들의 충만했던 한 순간은 다시 한 번 '기적처럼' 로드뷰에 남겨졌지만, 생기를 잃고 유효기간도 지난 감정이란 그런 것일까. 운 좋으면 마른꽃이 되는 꽃다발처럼 기억과 추억이면 그뿐이란 듯 영화는 쿨하게 끝난다.


알듯 모를 듯, 의미없이 감성만 넘치는 제목 같기도 해서 엄청 땡기지는 않았으나 영화관이 호러물 일색이라 통영에서 상영한다는 게 반가웠다. 비 예보가 있었으나 다음 날로 물러갔고 땡볕이 없는 날이라 움직여보자 하고 나섰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20대 초중반의 사랑을 다룬 덕인지, 캐릭터의 힘인지 저렇게나 깔끔하고 순순한 이별이라니 싶어 판타지멜로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영화 속 사랑이 현실의 모든 지난함을 반영할 이유는 없으니 됐고, 이별 장면에서의 대화 교차편집은 너무 과해서 오히려 감정을 반감시킨다고 느꼈지만 주인공들의 감정이 극대화되려면 그만큼이 필요했나 싶기도 했다. 대중문화와 예술에 매료된 청춘들의 이야기여서 언급되는 수많은 레퍼런스가 소화불량이면서도 인상적이었는데, 한국판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이들이 거론될까 혼자 궁금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감성과 디테일에 목숨 건 영화다 싶었는데, 특히 미술과 의상은 엄청 공들인 느낌을 넘어 대단하다 싶었고 강변 집의 커튼은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갖고 싶을 정도였다. 암튼, 놀라운 디테일과 일본인이 아니라면 소화하기 어려운 레퍼런스의 향연에도, 주로 공감하면서 때로 추억을 떠올리면서 볼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사랑의 기억과 추억이 있었기 때문이고. 덕분에 집에 오면서 싱숭생숭 벅차고 설레고는 했던 소시적 기억, 안양천이며 서대문 안산의 추억 같은 것들을 백만 년만에 떠올려보았다.  


7/17 cgv통영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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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