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3. 12. 22:0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문학을 전공하는 안은 눈에 띄는 외모에 학업에도 열심인 대학생이다. 학교에는 기숙사 방에 모여 여느 또래들처럼 이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나누며 수다를 떨고 공부 고민을 나누는 단짝 친구들도, 안을 주시하며 질시하는 무리도 있다. 안은 펍에서 콜라를 마시고 호감을 표하는 낯선 남자의 접근을 차단하며 '단정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때로 헤프다는 근거 없는 비난과 오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안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식당과 잡화점을 운영하며 대학에서 문학교사의 꿈을 준비하는 안을 지원한다. 주말에 집에 온 딸에게 책을 사 읽으라며 슬쩍 돈을 건네는 엄마에게서는 응원의 마음이 느껴진다.

특별할 것 없는 생활이 이어지는 가운데 안에게 어떤 조짐들이 찾아온다. 수업 시간에 딴 생각에 잠기고 단짝 친구들과 함께일 때 말수가 줄어든 안은, 통제할 수 없는 욕구에 이끌려 공동 냉장고에서 남의 음식을 훔쳐 먹기에 이른다.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찾아간 병원에서 임신 진단을 받은 안,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만 의사 역시 단호하게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절박함을 호소해 유산 가능성을 높여줄 약을 받아오지만, 안에게는 자신만의 지옥이 열렸다. 때는 1960년대, 프랑스에서 낙태죄는 불법이고 임신한 여성은 물론 도움을 준 의사도 실형에 처해지는 형편이다.

확증이 된 불안은 안의 일상을 뒤흔든다. 막막하고 혼란한 마음과 조금씩 변화하는 몸,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감내하며 안은 홀로 방법 찾기에 골몰한다. 곧잘하던 공부는 뒷전이 되고 수심에 잠긴 마음은 경직된 표정으로 굳어졌다. 시간이 지나며 다급해진 안은 다른 병원을 찾아가지만 의사의 답은 같다. 이전 병원에서 받아온 약이 오히려 태아를 강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절망은 더 깊어졌다. 문학교수의 미래를 꿈꾸는 안에게 예상치 못했던 임신과 출산은 “여자들만 걸리는 병”,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일 뿐이다. 사회는 임신을 오롯이 여성의 문제와 책임으로만 돌리고 중단할 수 있는 길을 막아 버렸다.

실낱 같은 희망을 걸고 여자들과 두루 친한 남자 동급생에게 도움을 청한 안에게 돌아온 것은, 임신했으니 상관 없지 않냐면서 안을 건드리고 섹스를 하려는 추행과 폭력이다. 고군분투하던 안은 결국 상대에게 연락을 취한다.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보냈던 그는 휴가차 안의 동네에 왔던 보르도의 정치학도, 연락 이후 안은 절박한 마음으로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부유한 가정과 촉망 받는 미래의 주인공인 그에게 안의 절박함 따위는 안중에 없다. 공감이나 위로는커녕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커플 데이트를 하게 된 자신의 잘나가는 친구들과 분위기 좋게 어울리지 못한다며 안을 몰아부친다.

분노와 상처를 안고 보르도에서 돌아온 안에게 남자 동급생이 한 여자를 소개하고, 그를 통해 안은 임신 중단 시술을 할 수 있는 곳의 연락처를 전해 받는다. 악세사리와 책 등 소중한 물건들을 팔아 적지 않은 비용을 마련한 안은 마침내 그곳에 찾아간다. 시술사는 안전과 청결을 강조하지만, 마취 없는 시술은 엄청난 고통을 동반하고 방음장치가 없는 그곳에서는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켜야만 한다. 시술을 마친 안은 무탈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다리며 경과를 살피지만, 임신 중단의 완결은 쉬이 오지 않는다. 다시 시술소를 찾아 위험을 무릅쓰고 추가적 조치를 받은 안은 기숙사로 돌아와 홀로 고통에 몸부림친다.

임신을 인지한 순간부터 그렇게 고대했던 마지막 순간, 화장실 변기에 앉아 극도의 통증을 견디던 안은 터져나오는 신음 소리를 숨길 수 없다. 기척을 듣고 화장실을 살피다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한 여자 동급생은, 차마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안의 부탁에 탯줄을 자른다. 의식을 잃은 안은 한밤중의 소동에 방에서 나온 기숙사생들의 주목 속에 병원으로 실려가고, '유산'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적나라한 시각화가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배우의 열연과 직시하는 연출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60년도 이전의 프랑스가 배경이지만 사회가 만든 부당함이 오롯이 개인의 경험과 고통으로 전가되는 부조리가 지금도 어떤 세계에서는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영화이기도 했다. 어느 정도 ‘문제를 해결’한 뒤 고향집 식탁에 함께 앉은 엄마 아빠의 웃음과 대화 장면은 꿈결 같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수 없는 현실이 한 사람에게 또 그 가정에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공포와 두려움을 달랠 새도 없이 홀로 방법 찾기에 골몰하는 안의 목적지가 '사건'이 발생하기 전의 상태일 뿐이라는 것이 허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룻밤의 사랑에도, 단짝 친구에게도, 믿었던 동기에게도 배신과 외면을 경험해야 했던 안이 기댈 곳이 불법 시술소뿐이었다는 것이, 그것이 현실이었다는 것이 지켜보기에 참 안쓰러웠다. 그렇게 외롭고 막막했던 안이 자기파괴의 몸부림처럼 소방관과 나누는 섹스는 슬펐고,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옮겨진 안에게 내려진 '유산'이라는 진단에 안도하는 마음이 착잡했다. 신체적인 고통에 본능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 말고는 대체로 무표정이었던 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아의 연기는 고행처럼 느껴졌고, 좌절과 절망의 연쇄에 놓인 안을 좇아가면서도 감정의 극대화 장치는 배제하고 상황을 관찰하듯 거리를 둔 건조한 연출이 오히려 현실의 섬뜩한 무게를 전하는 느낌이었다. 

원작 소설인 [사건]의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자전적인 경험들을 여러 작품 속에 나누어 녹여낸 작가라는 걸 읽은 적이 있다. 영화 개봉 소식 덕분에 오래 전 읽었던 [단순한 열정]이 떠올랐고 영화를 본 후 작가 인생의 중요한 두 가지 일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짝 친구의 뒤늦은 고백처럼 평범한 사랑을 나눴지만 운이 없었던 안, 그대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 용기를 낸 결과 청춘의 한 시절이 온통 지옥이 된 사정이 작가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메시지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겠지만 고통받았던 여성들과 그 역사를, 어디선가는 여전히 그러할 현실을 기억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영화였다.


3/10 cgv서면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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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