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01



다섯 명의 여동생들이 북적이는 가난한 집에서, 무시로 떠오르는 갖가지 영감들을 시도로 옮기는 데에 열중하면서도 신사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던 20대 루이스 웨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황소를 자세히 그리려다 공격을 받은 엔도버 농업박람회에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엉망이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기차 안에서도 동물 데생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윌리엄경의 <일러스트레이티드 오브 런던> 삽화 의뢰는 거절하고, 자신만의 오페라를 완성해 음악가에게 선보였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다.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듯 보이는 걸음걸이와 경직된 표정은 그를 뭔가에 미쳐있는 예술가처럼 느껴지게 만들지만, 복싱에도 열심인 의외의 모습도 비춰진다.

분주하게 내면의 열정과 에너지를 좇던 그는, 여동생들의 교육을 위해 들인 가정교사를 반대하지만 곧 포기하고 어딘가 통하는 면이 있는 가정교사 에밀리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미천한 계급 출신에 10살 연상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사랑을 키운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구순열을 가리기 위해 길렀던 수염을 면도하고 에밀리 앞에 서고, 두 사람은 가족의 우려와 주변의 수근거림 속에 결혼해 집을 떠난다. 하지만 에밀리와의 행복한 삶은 3년에 불과했고, 유방암으로 떠난 아내의 빈 자리는 어느 비 오는 날 집 근처에서 구조해 가족이 된 고양이 피터가 대신했다. 결혼으로 독립한 이후에도 프리랜서 화가로 일하며 원가족을 부양했던 그에게 어머니와 다섯 동생은, 그가 시련과 절망을 극복하는 데에 별로 역할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에게 원가족은 심리적 안정감이나 정서적 유대감을 기대할 수 없는 끊을 수 없는 굴레였지만 결국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고향이었던 것 같다.

루이스 웨인은 영화의 원제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처럼 당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전기에 관심이 많았고, 전기를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여겨 실제 발명에 몰두하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엉뚱하고 편집증적인 괴짜였다는 그의 남다른 언행은 영화에서 일관되게 재현되는데,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환영을 보거나 공황 장애 같은 증상에 시달렸던 경험 역시 섬세하게 그려진다. 물이 차오른 실내에서 고립되어 무기력해진 모습이나 어지럽게 흔들리거나 사납게 시야를 스치는 사물 등의 표현은 그가 보고 느끼는 감각적 공포를 그대로 전하면서도, 그의 불안한 정신 세계와 말년에 앓았다는 조현병을 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에밀리와 피터를 통해 그리게 된 고양이 그림의 성공으로 대중적 열광을 받기도 하고, 당시에는 환영받지 못한 동물이었던 고양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큰 각광을 받기도 하지만, 그런 순간에조차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어린 시절 내면의 괴로움을 자신만의 일기로 남기며 삭였던 그를 이해했던 에밀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어머니가 물려준 숄의 한 조각을 찢어 그 일기장에 꽂아두었다. 피터와 함께 에밀리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그림을 그렸던 루이스 웨인은 세월이 흘러 피터마저 떠나자 다시 한 번 무너진다. 그럼에도 그는 에밀리가 남긴 “기억해. 세상은 아름다워, 당신이 있어서 그걸 알게 됐어. 사람들에게 전해야 해.”라는 말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데, 삶과 예술의 괴리를 홀로 감당하며 그의 영혼은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 안쓰럽기도 하다. 영화가 전기적 사실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막중한 책임감을 요구했던 가족들 외에는 그의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삶이 괴로울수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감동받아 지면을 내어주고 오랫동안 조용히 지지했던 윌리엄경과 빈곤자 병동에 머물던 말년의 그를 안락한 병원으로 옮겨준 댄 라이더라도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웠다.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루이스 웨인이라는 존재도 신기했지만, 그를 연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더 인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직업 배우가 캐릭터에 맞는 새로운 연기를 선보이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이전에 봤던 [차일드 인 타임], [모리타니안], [파워 오브 도그] 같은 영화들을 생각하면 사진과 기록으로만 남은 특별한 실존 인물 그 자체로 거듭난 모습이 신기하고 좀 감동적이기도 했다. 루이스 웨인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었지만 프레임 속 그를 둘러싼 주변의 반응을 통해 시대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점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루이스 웨인이 경험하는 불가해한 감각의 일부라도 관객에게 함께 전달함으로써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해 이해시키고자 노력하는 감독의 마음이 영화에 담겼던 것 같다. 영화 이전에 루이스 웨인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거나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선물처럼 느껴지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4/17 cgv서면3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스팅 글로리아]  (0) 2022.04.18
[사랑 후의 두 여자]  (0) 2022.04.18
[패러렐 마더스]  (0) 2022.04.18
[킹 리차드]  (0) 2022.03.29
[벨파스트]  (0) 2022.03.29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