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이와 춘팔이 외로운 고아라네
둘이의 소원은 어른이 되는 것
그러나 커가면서 느끼게 되었네
맑은 두 눈에 비친 어른의 모습
사람들은 왜 그렇게
따듯한 사랑을 갖지 못할까
서로 욕하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싸우며 자기만 아는
그런 모습이었어
어른들은 말하네 크면 알게 된다고
하지만 진실은 변함이 없는 것
아무런 가책없이 위선에 묻혀서
때론 인정 많은 체 때론 정의로운 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진실한 가슴을 갖지 못할까
힘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울게 만드는 거짓 사랑을
그런 모습이었어
삼봉이가 말했네 우리가 어른 되면
사랑을 노래하는 그런 사람이 되자
춘팔이가 말했네 나는 어른이 싫어
해와 달과 별처럼
이대로가 좋아
작사 최원무, 작곡 조성오
어렸을 때는 판단도 쉬웠고 세상도 선명했다. 내 편 아니면 니 편, 둘 중 하나가 아닌 것은 내 세상에 없었다. 조금씩 커가면서 '편'이라는 게 참 유치해서, 그런 구분은 그만해야지 하던 때를 지나... 나이는 어른인데 나는 여전히 아이인 채로, 그 '편'이란 말이 참 애잔해졌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것, 혹은 내가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 상황이나 맥락 혹은 옳고 그름을 떠난 '무조건'이란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 간절했던 걸까.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단 한 사람 끝내 뒷모습을 보이지 않는 내 편이 있다면 그 힘만으로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양비론이 멋져 보일 때도 있었다. 정황을 살피고 전후사정을 고려하고 알량한 이성을 동원하다보면, 누구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지는 않았다. 정말 드물게 온전히 옳더라도 전심을 다해 편을 들어주는 건 어쩐지 주관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 주저하게 되기도 했다. 혹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온 마음을 다해 편이 되어줄 수도 있었지만, 생물이며 동물인 누군가에게 하나뿐인 마음을 온전히 내어준다는 건 보통의 믿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일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편을 든다'는 것의 사회적 의미를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경우 누구의 편이 된다는 것은 그 나머지의 반대편이 된다는 것을 뜻했다.
믿어주고 싶은 사람이 곤경에 빠졌다. 믿어주고 싶다는 것과 믿음이 있다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놓여있는지를 비로소 실감한다. 여전히 어른의 나이에 어른 아닌 마음으로 살고 있지만, 실은 나도 어른이다. 편을 든다는 것은 얼마나 순진하고 유치한 일인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렸을 적에는 놀이처럼 쉬웠던 일들이 어른이 되고나니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일이 되어버렸다. 믿어주고 싶은 사람 속의 진실은 나도 알지 못한다. 사람은 모른다,와 그러나 아닐 것이다, 사이에서 내 마음도 흔들린다. 이미 건너버린 시간 저 편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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