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반엔 판타지블랙코미디인가 했는데 진행될수록 외롭고 정이 고프고 그래서 쉽게 자신을 걸고 또 배신 당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태인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도화될수록 고립되고 사회화로부터 멀어지는 오늘날 인간사의 모습 같은. 들을 수 있지만 말하지 않는 태인처럼, 곁에 있다는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치는 박수처럼, 어쩌면 우리에게 그다지 많은 말이 필요한 건 아닐지 모르겠다는 느낌도 함께.
트럭에 계란을 싣고 다니며 파는 창복과 태인은 인적 드문 나무 아래 노점을 펼친 동네 할머니에게 계란 몇 알을 선물할 줄도 알고, 아이를 인질로 하는 범죄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선량하고 평범한 이들이지만... 한편 그들의 생활에서 더 중요한 일은 범죄조직의 말단 외주업체처럼 살인의 현장을 준비하고 청소하고 시신을 처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해자와 피해자, 아이와 어른, 갑과 을... 언뜻 대비되는 듯 보이는 인물들의 상황과 역할이 전도되고 반전되는 설정이, 관객의 허를 찌르듯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 인식의 토대 위에 있는가를 역설하는 것 같은 영화이기도 했다.
‘소리도 없이’, ‘하늘로 편안히’ 사라져버린 창복의 후일담이 1도 없는 게 자연스러운 듯 조금 아쉽기는 했고, 마지막 혹여나 불안했던 문주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싶었고. 말도 몸도 내려놓은 채 짐승처럼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연기를 선보인 유아인 배우, 인정과 비윤리가 같은 태생의 성정인 양 도덕적 판단중지 상태의 인물 그 자체였던 유재명 배우, 생존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어른의 얼굴을 한 초희 역할 배우, 그리고 천진무구한 문주 역할 배우 등 주연 배우들의 연기 덕에 영화에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로 세상을 보는 다른 필터를 시연하는 것 같은 풍광, 가끔은 태초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가상의 세계처럼 몽환적으로 보이기도 했던 태인의 집, 베이스인지 퍼커션인지 낮은 심장 박동처럼 들렸던 음악도 인상적이었다.
10/15 cgv영등포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테로] (0) | 2020.10.22 |
---|---|
[후쿠오카] (0) | 2020.10.22 |
[어디갔어, 버나뎃] (0) | 2020.10.08 |
[타이페이 스토리] (0) | 2020.10.05 |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0) | 2020.1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