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열린 창으로 흰 레이스 커튼이 바람에 날렸던가. 방 안의 사물들이 천천히 물결처럼 클로즈업되는 동안, 누군가 벽에 머리를 찧는 듯한 소리가 쿵- 쿵- 이어진다. 주인공 알리스다(영화에서 그는 번호로 불린다, 124.. 다섯 자리였는데 물론 까먹음).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그를 비추는 화면, 테이프플레이어에서는 기억이 어쩌고 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집을 나서며 이웃의 반려견 '말루'를 알은 체하고 그가 걷는 길에서는, 차에서 내린 한 여인이 보도블럭에 걸터앉은 남자를 발견하고 구급차를 부르는 모습이 담긴다.
알리스는 꽃집에 들러 작은 꽃다발을 하나 샀는데 눈을 떠보니 버스 안, 그것도 어둠이 내린 종점에 혼자다. 신분증이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못한 알리스는 구급차를 통해 어딘가로 인계된다. 그곳에서는 알리스처럼 기억을 잃은 이들이 실려와 죄수들처럼 프로필 사진을 찍히고 번호를 부여받는다. 세상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억상실증이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 알리스는 병원에 수용된다. 옆 침대의 사람이 식판에 담긴 식사를 하는 동안 알리스는 다른 음식은 손도 안 댄 채 사과만 먹는다. 그 맛을 좋아하는 것인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맛이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알리스는 열심히 사과를 먹는다. 옆 사람이 먹지 않는 사과를 얻어 먹고 병원에서도 주식 겸 간식으로 사과를 먹는다.
며칠이 지나자 가족이 찾아왔다는 옆 침대의 사람은 떠나고 없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들은 병원에 수용되어 진단과 치료를 받고, 찾아오는 가족을 통해서든 어떻게든 신원이 확인되어야 퇴원할 수 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알리스는 캐롤이나 "백조의 호수"를 듣고 어울리는 그와 산타나 발레리나의 그림카드를 골라내는 일조차 어렵다. 남겨진 이들에게는 '인생 배우기', '새로운 자아' 프로그램이 권장된다. 기억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망각한 이들이 새롭게 인생을 배우는 과정, 받아들이기로 하면 새로운 거처가 정해지고 일정한 미션이 순차적으로 부여된다. 알리스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한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의료진의 안내로 작은 집에 도착한다. 매뉴얼에 따라 매일 미션이 도착할 것이고 그것을 수행하고 폴라로이드 사진 기록으로 남기며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워나가야 한다. 알리스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전거 타기, 코스프레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낯선 여인과 친밀감 나누기, 다이빙하기, 영화 보기 등을 배워나간다. 구부정한 상체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메고 거리로 나선 알리스는 세상과 서먹하지만, 조용히 최선을 다한다. 공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달에 착륙한 우주인 복장의 코스프레를 하고, 스트립바의 댄서와 사진을 찍고, 제시된 높이보다 낮은 곳에서 뛰어내리지만 다이빙을 하며 나름 착실하게 미션을 수행하고 기록을 남긴다.
미션 과정에서 자신처럼 폴라로이드를 메고 쭈뼛거리는 사람을 만나 촬영팁을 알려주기도 하며 조금씩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알리스는, 영화 보기 미션을 수행한 극장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인 안나를 만나 동료가 된다. 알리스보다 먼저 프로그램을 시작한 안나는 더 많은 것을 해왔고, 혼자서는 조금 힘든 미션에 함께해줄 것을 제안한다. 안나가 운전하는 낡은 차를 타고 나선 교외 드라이브에서 알리스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부른다. 안나와 함께 들른 펍에서 흐르는 음악에 걸맞는 트위스트를 몸에 배인 동작처럼 멋지게 소화하는 사람은 그뿐이다.
확신할 수 없는 호감에 이끌려 안나와 은밀한 교감을 나눌 기회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매뉴얼의 일부였음을 자신에게도 주어진 미션으로 깨닫는다. 안나와의 어긋남 이후에도 알리스의 미션 수행은 이어진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를 찾아가 도우라는 미션에 따라 병원을 찾은 그는 한 노인을 만난다. 한눈에 봐도 삶의 막바지에 이른 듯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노인과 대화를 나누고, 그를 위해 어설픈 솜씨로 초콜릿파이를 만든다. 아내가 만들어주던 초콜릿파이를 맛보고 싶다는 노인을 위한 선물을 챙겨 들어선 병실의 침대는 비어 있다. 노인의 장례식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던 알리스는 숙소로 돌아와 미션 수행을 위해 입었던 옷과 신발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자신이 옷으로 갈아입는다.
귀가길 사과를 사기 위해 들르는 과일가게에서, 낯선 손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주인에게 알리스는 '135번지'라고 무심결에 말했다가 주소를 정정한다. 기억을 상실한 직후부터 집요하게 사과만을 먹던 알리스는, 사과가 기억력에 좋다는 과일과게 주인의 말에 들고 있던 사과를 내려놓고 오렌지를 산다. 어느 날 산책길 우연히 마주친, 예전의 이웃집 개 말루는 알리스의 체취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다가오지만 주인이 다가오자 알리스는 황급히 자리를 뜬다. 코스프레 파티에서 우주인으로 분했던 알리스는 돌아와 무중력의 세상에 잠시 머무른다. 아무런 힘도 작용하지 않는 세계를 유영하듯 느릿한 몸짓으로 멈추었던 그는 원래의 세계로 귀환하듯 우주복을 벗는다.
알리스는 기억이 사라져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일상 속에서 혼란스러운 가운데 새롭게 발견하고 배워가며 삶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이다. 한편 알리스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운 채 이전 삶의 모든 것을 스스로 단절하고 자신마저 낯선 상태로 방치하며 방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노인의 장례식에서 돌아와 미션의 착장을 내려놓은 알리스가 향한 곳은 자신이 살던 집이다. 현관문의 작은 방범창으로 어렵사리 팔을 집어넣어 문을 열고 돌아온 곳은, 영화가 시작된 장소다. 어수선하게 어지러진 채 비워졌던 집은 낯설지만 익숙하다. 알리스의 시선을 따라 집안을 훑던 카메라가 향한 곳은 상하기 시작한 사과들, 알리스는 그중 멀쩡해 보이는 사과 하나를 집어 깎는다.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에서 기억을 잃은 혹은 기억을 지운 알리스라는 정반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알리스의 감정과 행동은 어떻게 받아들여도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노인의 장례식 이후 인서트처럼 삽입된 화면의 묘비에는 '안나'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알리스가 만나고 어긋났던 여인의 이름도 안나였다. 놓았던 혹은 잃었던 기억에서/으로 돌아온 알리스의 여정을 따르는 영화는 고요하고 단정하다. 기억 혹은 삶을 상실한 이들의 담담한 체념과 침잠을 정갈한 연출에 담아 묵직한 울림과 여운을 선사한다. 깊은 경험이 결합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영화인 것도 같아서, "콘스탄티노스 니코우를 기리며"라는 자막을 보며 혹시 '감독의 안나'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dvd가 출시되면 소장하고 싶은데 과연? 아무려나, 엄청난 영화를 보았다.
* 영화에는 "Another Day", "Scarborough Fair", "Sealed with a kiss" 등 귀에 익은 올드팝이 여러 곡 흐르는데 심사숙고한 선곡이라고 느꼈다. 나중에 궁금할까봐 기록-
5/30 cgv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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