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6. 11. 22:3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낡은 기차와 덜덜거리는 고물차를 타고 결혼식이 열리는 시골 마을 코콜라에 도착한 올리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다. 미사가 열리는 중에도 산만하게 몸무게며 체급이며 다음 경기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내는 마을 사람들, 눈치껏 답하는 올리의 신경은 라이야를 향해 있다. 흥겨운 피로연장을 빠져나와 남몰래 키스를 나누며 환히 웃던 두 사람은 얼마 후 함께 헬싱키로 떠난다. 그들이 닿은 곳은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올리의 코치이자 프로모터인 엘리스의 집이다. 여장부 아내와 네 아이가 함께 사는 넓지 않은 집에, 라이야까지 동반한 올리의 기숙은 환영받지 못하지만 더 중요한 건 머지 않은 타이틀 매치다.

 

시골 마을의 제빵사였다던 올리는 뒤늦게 시작한 권투 시합에서 승승장구하며 화제의 인물이 됐다. 코치의 결정으로 이전 자신의 체급보다 더 많은 감량을 해야 하고,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세계 챔피언십이 목전이라 언론의 주목도 상당하다. 올리의 승리가 곧 자신의 성공인 코치는 어색해하는 올리를 자꾸만 카메라 앞으로 떠밀고 기자간담회는 물론 다큐 촬영에 양복점 광고까지 강행하며 흥행에 기름을 붓기에 바쁘다. 큰 경기를 앞둔 부담감과 원치 않는 유명세로 불안한 올리의 마음에 평안을 선사하는 존재인 라이야는, 눈치없는 동행으로 대략 유령 취급을 받으며 함께한다.

 

시도때도 없이 따라붙는 카메라와 좀처럼 빠지지 않는 몸무게, 과도한 관심과 마음처럼 조절되지 않는 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훈련을 이어가던 중 올리는 라이야와 동료 선수와 함께 동네의 한 게임장을 찾는다. 전면에 쳐진 그물 뒤로 허술한 다이빙대 같은 판자가 양쪽에 놓여 있고 그 아래는 물이 차있는 풀, 진한 화장과 야한 복장의 두 여성이 각각의 판자 위에 인어처럼 누우면 잔뜩 흥분한 사람들은 공을 던진다. 누군가의 공이 명중하면 판자는 기울어지고 그 위의 여성은 웃음을 잃지 않은 채 물에 빠지고, 다투어 공을 던지던 사람들은 환호한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게임이지만, 중압감으로 심신이 괴로운 올리에게는 잠시나마 숨통을 틔워줬을지 모른다.

 

올리와 동행하며 안정감을 선사하던 라이야는 주변의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에 고향으로 돌아간다. 경기일은 다가오는데 올리의 몸무게는 목표한 만큼 빠지지 않고, 와중에 타이틀 매치를 치를 세계챔피언 데이빗 무어가 도착해 다시 한 번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된다. 라이야가 떠난 뒤 고군분투하던 올리는 경기와 계체량보다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라이야와의 사랑임을 깨닫지만, 게임의 흥행과 올리의 승리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엘리스 코치는 이를 황당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과열된 관심으로부터 탈주하듯 코콜라를 찾은 올리는 잠시 라이야와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스리고, "실망하는 사람의 헛된 기대까지 책임질 필요 없어" 라이야의 말에 다시 힘을 얻는다. 사우나에서 쓰러질 만큼 혹독한 노력 끝에 계체량을 통과한 올리는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링에 오른다.

 

1962년 8얼 17일, 대망의 세계챔피언 도전 경기에서 올리는 2라운드만에 허무하게 패한다. 힘없이 돌아온 대기실에도 어김없이 다큐 카메라가 기다리고, 내키지 않는 연회에도 얼굴을 비춰야 한다. 코치의 무리한 핸들링을 따르느라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던 올리에게는 승리든 패배든 경기가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해방일지 모르겠다. 경기를 준비하며 방황하던 올리가 혼자서 게임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관중이 없는 텅빈 실내는 적막하고 조심스레 다가간 대기실에는 시선의 폭력을 환한 미소로 견디던 여성이 수심 가득찬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겠다. 경기 패배 후 잠시 자리했던 연회장을 라이야와 함께 빠져나온 올리는 조용한 강변을 거닐고 고향에서처럼 물수제비를 뜬다. 곁을 지나는 노부부를 보며 함께 행복하게 나이 드는 일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 8월 17일은 올리가 라이야와 약혼한 '가장 행복한 날'이기도 하다.

 

 

예고편에서 핀란드 국민영웅의 실화 로맨스였나 하는 문구를 보았었다. 올리 마키는 초면이고 1960년대 초반 핀란드에 대해서는 무지한 외국 관객으로서 실존 인물의 실제 이야기라는 점을 상기하며 다소 애매한 상태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전직 제빵사였던 그가 권투 선수가 된 계기나 위상 등에 대한 배경 서사는 생략되고 약간 다짜고짜 이야기가 전개되는 느낌이기도 했고, 초반부터 초근접 핸드헬드 촬영이 많이 등장하고 거의 한 장소에서 한 샷을 찍은 느낌의 속도감 넘치는 장면 전환이 반복되어 따라가기 바빴던 것 같다. 영화를 선택하고 기대한 이유는 오로지 [6번 칸]이었는데, 과거 배경의 흑백 영화라는 점부터 완전히 다르고 문외한이니 잘 모르기도 하지만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걸 크게 느낄 수 없기는 했다.

 

무조건 볼 계획이었기 때문에 부러 다른 정보를 찾아보지 않았었는데, 올리 마키에게 매력을 느낀 감독이 고령의 그를 인터뷰하며 영화를 준비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강변을 지나가는 노부부가 실제 올리와 라이야였다는 걸 후에 기사를 보고 알게 되어 괜히 조금 아쉬웠다. 당대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당시의 16mm 흑백 필름을 구해 촬영했다는데 그런 기술적인 부분은 감지하거나 변별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뭔가 감독의 진심 같은 게 미덥게 느껴지기는 했다. 주연 배우들 역시 모두 초면이었는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감량되는 체중이 너무 느껴졌던 올리 역의 배우가 안쓰럽기도 하고 너무 진짜 같기도 했고, 실제 모습에 가까운 캐스팅이었는지 모르지만 통상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 커플의 전형적인 체구 차이를 전복하는 시각적인 체험은 약간 신선했다.

 

 

6/9 cgv서면 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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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