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흐르는 아일랜드의 뉴로스, 겨울을 앞둔 1985년의 풍경은 스산하다. 날씨 못지않게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지역 경제도 춥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한 긴 줄이 늘어서고, 조선소와 큰 공장과 오래된 회사들이 문을 닫으며 일자리를 잃는 이들이 늘어난다. 런던, 보스턴, 뉴욕 등으로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소식도 라디오를 통해 전해진다. 와중에 배달 트럭의 타이어가 닳도록 바쁘게 일하는 마을의 석탄·목재상 빌 펄롱이 있다.
빌 펄롱은 어린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엄마가 일하던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자랐다. 농장과 연금으로 생활하는 미망인이었던 미시즈 윌슨은 펄롱을 잘 돌봐줬지만, 아빠가 없는 일꾼의 자식은 학교에서 곧잘 놀림을 당했다. 마음속에 늘 품고 있던 아빠에 대한 궁금증은 열두 살 때 갑작스럽게 엄마가 세상을 떠나며 풀 길이 없어졌다. 몇 년 후 출생증명서 사본을 떼며 아버지 이름 난의 ‘미상’이라는 기록을 확인하고, 증명서를 건네는 등기소 직원의 추한 웃음을 경험한 후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결심한다.
1946년 4월 1일 만우절에 태어난 빌 펄롱은 40년 인생의 절반쯤을 미시즈 윌슨에게 의탁했다. 태생적 결핍과 어릴 적 닥친 불운의 보호막이었던 미시즈 윌슨은, 아일린을 만나 약혼한 펄롱에게 몇 천 파운드를 주며 독립을 도왔다. 토요일마다 사무실에 출근해 아빠를 돕는 캐슬린, 얼마 전 합창단에 들어간 똘똘한 조앤, 화요일마다 수녀원에서 아코디언을 배우는 열한 달 터울의 실라와 그레이스, 수줍음 많은 막내 로레타. 이제 펄롱은 생활력 강한 아일린과 다섯 딸을 키우면서 때로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간다.
딸들의 재잘거림이 끊이지 않는 집안과 혹독한 겨울이 닥친 마을의 풍경은 대조적이다. 실업수당이며 아동수당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줄은 더 길어졌고, 거리에서는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어린 아이가 눈에 들어온다. 고통받는 이웃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빌 펄롱은 땔감을 구하러 나온 소년에게 굳이 잔돈을 건네고 알콜릭인 그의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다. 더불어 그럴수록 잘 버티면서, 딸들이 마을 유일의 명문 세인트마거릿 여학교를 무사히 졸업할 수 있도록 돕기로 마음먹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12월이 되자 시청 앞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의 점등식이 열리고 마을 사람들이 몰려든다. 경기가 나빠도 축제 분위기는 무르익고, 펄롱의 딸들도 각자 받고 싶은 선물을 고심하며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받고 싶은 선물을 묻는 아내의 질문에 아이들도 함께 볼 수 있는 큰 사전을 떠올리고 답하는 펄롱, 자주 회상에 빠져드는 그에게 꼭 받고 싶었던 지그소 퍼즐 대신 미시즈 윌슨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선물로 받았던 어느 성탄의 기억이 찾아온다. 책을 읽느라 사전을 찾고 다음해 맞춤법 대회에서 1등을 해 미시즈 윌슨의 큰 칭찬을 받고는 얼마간 자존감이 고양됐던 경험도 함께 떠오른다.
어느 날 빌 펄롱은 약속 시간보다 일찍 수녀원에 배달 갔다가 허름한 입성으로 바닥을 닦는 여자들을 목격하고, 자신을 밖으로 강가로 데리고 나가달라며 애원하는 소녀를 마주친다. 금세 수녀가 나타나 상황이 정리됐지만 그 장면은, 불현듯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며 생각이 많아지곤 하는 펄롱에게 또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된다.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 당신도 그건 잘 알겠지.”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 침대에서도 뇌리를 맴돌다 결국 입 밖으로 나온 이야기에 대한 아일린의 반응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펄롱에게는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일요일 새벽, 수녀원으로 배달을 간 펄롱은 석탄 광에서 밤새 갇혀 있던 여자 아이를 마주친다. 얼마 전보다 한층 충격적인 상황이다. 누군가 데려간 자신의 14주 된 아기를 수소문하는 아이를 보며 잠시 집으로 데려갈까 그냥 모른 척할까 갈등하던 펄롱은 결국 함께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수녀원장의 강권에 아이와 함께 티타임을 갖고 담소를 나누며 펄롱은 수녀원의 치부를 연이어 목격한 자의 불편과 위험을 체감한다. 수녀원의 지시대로 거짓말을 하는 아이, 아이가 물러간 뒤 딸들과 아일린의 안부를 묻고 크리스마스 카드와 돈 봉투를 건네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수녀원장, 그리고 그 상황을 묵묵히 감내하고 만 펄롱.
모든 걸 외면할 수 없었던 펄롱은 아이의 이름을 묻고, 원한다면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짧은 대화를 끝으로 수녀원을 나선다. 펄롱이 본 것은 수녀원이 운영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실상이 별로 알려진 바 없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의 현실이었다. 타락한 여자를 교화시킨다느니 미혼모와 아이를 받아 입양시키는 사업을 하는 모자 보호소라느니 소문은 많았지만 진실은 가려진 곳들이었다. 수녀원은 마을 사람 누구에게도 척져서 좋을 게 없는 거대 권력이다. 딸들이 다니는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와 밀접했고 석탄‧목재상을 운영하는 펄롱에게 큰 고객이었다.
아이의 이름은 ‘세라’, 펄롱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다.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주일 미사에 참석한 펄롱은 심란할 수밖에 없다. 집으로 돌아온 펄롱은 네드를 찾아간다. 네드는 이제 펄롱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고, 미시즈 윌슨이 살아 있었던 몇 해 전 함께 술을 마시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물었던 일이 떠오른다. 펄롱이 태어나기 전 여름 저택에 윌슨 집안의 돈 많고 잘난 친척들이 왔었다며 네드는 “하느님만이 아시겠지.” 라고, “어쨌거나 결국에는 잘 풀린 거지? 여기에서 잘 컸고, 지금도 잘 살고 있잖아.” 라고 답했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 집에 네드는 없다. 폐렴으로 다른 곳에서 요양 중이라며 소식을 알려준 그 집의 누군가는 한눈에 네드와 펄롱의 닮은 생김새를 알아본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결국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질문의 해답이 난생 처음 보는 타인으로부터 너무 쉽게 전해졌다. 안팎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크리스마스 이브날도 일하러 나간 펄롱은 마을의 사랑방 케호 식당에서 수녀원과 관련된 자신의 소문과 조언을 듣는다. 미리 봐둔 아내의 선물을 구입하고 이발소에 들러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네드의 얼굴을, 과거 함께 살던 시절 네드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전지적 작가 시점의 살짝 민망한 독백.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동정과 배려, 연민 가득한 캐릭터지만 이쯤 되면 꽤나 눈치 없다고밖에 볼 수 없는 펄롱의 모습이다. 물론 너무 어렸을 때부터 그냥 함께하던,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는 단념을 선사한 당사자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소설에서 네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어서 갑자기 ‘나날의 은총’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게 좀 당황스러웠다. 작품 안에서 대답 외의 발언권을 얻지 못한 네드의 심정에 대해 문득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하지만 구성상 네드가 친부임을 확인한 사실이 수녀원의 세라를 향해 용기 낸 조용한 트리거처럼 작용하는 것 같아서 차분하게 흐르던 이야기가 조금 억지스러운 전환점을 맞이하는 느낌은 지우기 어려웠다. 근본적으로는 미혼모인 엄마와 자신을 보듬어준 미시즈 윌슨의 영향이 다분했을 펄롱의 성정이 컸겠고, 어쨌든 작품에 약간의 극적인 매개는 필요했겠지만 말이다. 하여 펄롱은 이발소를 나와 수녀원을 향한다. 그리고 다시 석탄 광 안에 갇혀 있던 세라를 부축해 거리로 나온다.
영화에서는 세라와 펄롱이 집으로 향하는 길이 흡사 외롭고 힘겨운 행군처럼 두 사람만 부각되는 느낌이었는데, 소설에서는 야박하고 차가운 세상의 의인화처럼 적잖은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일린과 다섯 딸들이 있는 집에 세라와 함께 당도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멈춘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작가가 펄롱 대신 말하면서. 그리고 펄롱은 다시 한 번 미시즈 윌슨을 떠올리고, 자신의 용기보다 컸을 아이의 고통을 떠올린다.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메리 매케이 선생님에게.”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 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26)에서 발췌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짧은 헌사와 제사다. 영화를 봤을 때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마지막의 짧은 자막이었다. 막달레나 보호소가 1922년부터 1998년까지 운영됐고 5만 6천 명의 여성과 아이들이 고통 받았다는 내용이었는데, 소설에서는 ‘덧붙이는 말’에 1996년에 세탁소가 문을 닫았다 하고 피해자의 숫자도 더 적게 기록되어 있다. 작가는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허구’라고 적었지만, 머지않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기록된 숫자의 차이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더불어 독립이라는 ‘큰 대의’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학대와 인권 문제라는 ‘작은 대의’가 공존하는 세계의 비극적인 보편성에 생각이 미쳤다.
서너 달 전에 영화를 봤기 때문에 소설을 읽으며 자동적으로 영화의 장면들이 떠올랐고, 은연중에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며 읽었다. 전반적으로 영화보다 소설이 예리하고 역동적인 느낌이었다. 어둡고 가라앉은 분위기와 정적이고 무언가에 잠식된 느낌은 비슷했지만, 대다수가 힘겨운 겨울나기 중인 1985년 아일랜드의 뉴로스라는 작은 마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주는 생동감 덕분인 것 같다. 베껴 찍은 듯 소설을 그대로 차용한 부분도 있었지만 소설이 그려내는 시공간의 정보는 영화를 보며 미처 감지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본 덕에, 초반 막달레나 보호소 앞에서 세라가 억지로 맡겨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고 내용의 갈피를 잡는 데에 유용한 에피소드였는데 소설에는 아예 없었다. 각색의 영역일 텐데, 개인적으로는 미세한 차이나마 영화의 전개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작품의 원탑 주인공 빌 펄롱의 비중과 존재감은 소설에서도 압도적이다. 정확히 기억하는 작품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오펜하이머]뿐이지만, 대배우의 반열에 오른 킬리언 머피가 제작까지 한 데다, 영화를 먼저 보았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빌 펄롱 = 킬리언 머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는 꽤 묽고 옅고 진중하면서도 가냘픈 캐릭터로 느껴졌던 빌 펄롱이 소설에서는 그냥 조금 더 양심적이고 예민한 면을 가진 보통의 사람으로 다가왔고, 영화에서는 감성적인 접근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네드가 소설에서는 조금 더 설명되는 느낌이었다. 영화에서 꽤나 신랄하고 표독스럽게 그려졌던 수녀는 소설에서 구조적이고 상식적인 악역으로 그려진 것 같다.
영화 [말없는 소녀]는 봤지만 클레어 키건의 책은 처음 읽었는데 업계의 찬사만큼의 감동을 받지는 못했고, ‘옮긴이의 글’은 소설을 좀 더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됐던 것 같다. 첫 문단을 읽으며 당연히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떠올리지 못했고, 소설의 ‘진술’ 덕분에 영화에서 미처 캐치하지 못한 부분이 늦게나마 다가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후반부에서는 작가의 ‘진술’에서 펄롱의 선택에 대한 설명이 직접적으로 나오고 그것이 바로 메시지여서, 작가가 강조했다는 진술보다 암시라는 말이 의아하게 느껴졌다. 두세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은 책이라는데, 그럴 정성은 없는 무심한 독자로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다.
소설이 원작이지만 작가와 펄롱의 마음을 내레이션으로 굳이 다 전달하지 않은 영화가 내게는 더 큰 울림을 남겨줬다. 특히 거의 아무 말도 없이 험한 세상의 축소판 같은 거리를 걸어 집에 닿은 펄롱과 세라의 모습 그리고 현관 앞 욕실에서 열심히 손을 씻고 나온 펄롱이 머뭇거리며 서 있던 세라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집안을 비추며 딱 멈춘 마지막 씬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소설과 비교한다면 그건 영화의 특권 같은 것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됐다. 소설이 없었다면 영화도 나오지 않았겠지만 나는 영화가 오히려 좋았다. 작품의 암시와 압축을 별로 알아채지 못한 탓에, 소설은 역사적 실재와 사회상을 잘 담아낸 현대판 크리스마스 캐럴 같다는 얄팍한 독후감으로 남았다.
클레어 키건•홍한별 옮김
2023.11.27.초판1쇄발행 2024.1.26.초판22쇄발행,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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