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6. 1. 6. 04:09


잊고 싶은 특정인에 대한 기억들을 모아 기억회로를 만들고 영원히 삭제할 수 있다, 두렵고도 만화같은 가정에 근거한 영화. "트루먼쇼"는 좀 달랐지만 그 옛날 "마스크"의 강렬한 인상이 여전한 채로, 12년 전의, 짐 캐리, 조엘을 영화관에서 만날 줄은. 그것도 지난해 부산 이후 처음, 새해 첫 영화로 말이다.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고, 점점 빠져들고, 사랑의 감정이 충만해지고, 그러다 조금씩 지루해지고, 때로 비루해지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표정과 연기가 너무 싱그럽고 생생해서, 보는 내 얼굴 근육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욱해서 지우고 괴로워서 지우기로 한 기억 속을 헤매고 달리며 그들이 마주친 수많은 추억의 편린들, 두어 계절만 함께했어도 연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간질하고 간절하고 이따금은 끔찍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참으로 내밀하고 특별한 기억들. 언제나 처음만 같다면 참 좋겠지만 절대 그럴 리 없는 관계의 시간들, 하지만 서로를 향한 악의에 찬 바닥의 말들을 확인하고도 끝내 마주하고야 마는 헤어나올 수 없는 어리석음. 어쩌면 우리는 그 어리석음과 물리적인 기제를 동원하지 않아도 작용하는 선택적 망각 덕분에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처럼 그 누군가가 또다시 너- 라면, 이미 지워진 기억 속에 침잠해 있을 과거의 불신과 분명히 언제고 반복될 미래의 권태를 감수할 용기마저 길어올릴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인연이거나 운명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질 것이다. 

눈이 깊은 배우들의 기억을 넘어서는 사랑, 이야기 못지 않게 마음에 닿았던 것은... 기억을 지우는 라쿠나의 기술자들, 직업적으로 전문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상처받은 이들의 기억을 지우며 감정과 삶을 일종의 관리가능한 영역으로 상정하는 그들의 모순과 위태로움. 하워드와 매리, 매리와 스탠, 그리고 클레멘타인에 대한 패트릭의 감정이었다. 일터에서만 구가되는 세련된 안정감, 망각 혹은 욕망의 당사자로서 흔들리고 배신하고 괴로워하며 결국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마는 허약한 견고함, 뜬금 없지만 우리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재의 심연과 동떨어진 것인가 싶기도.

아무려나, 영화는 명불허전- 참 좋았고. 중간중간 문득 예전에 봤던 다른 영화의 장면들이 겹쳐 떠오르며 아련한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우리도 사랑일까"니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같은 영화를 영화관에서 다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어졌다. 오랜만에 찾은 극장은 예전 언젠가 "R.E.C"를 보러 먼 길을 왔었던 곳인데, 집 가까이에 있다면 참 좋겠다 생각하며 바라본 지하철 창에 부서지는 햇살이 꽤 따뜻했다 싶고. 그러고 보니 영화의 분위기와 닮은 듯도 하다. 마지막에 나직이 흐르던 노래의 가사처럼, 마음을 바꾸고 주위를 둘러보면.. 정말로 무언가 달라질런지, 햇빛처럼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나도 언젠가 배우게 될런지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이런 영화 보며 마음을 순정히 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간만에 기분이 맑아졌으니까.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s" > https://www.youtube.com/watch?v=PaI1sLqFO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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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