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가 꿈인 지수는 거리에서 관객 없는 공연을 계속하며 아빠의 공장일에도 매여 있다. 배달일을 하는 원호는 소년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위협을 피하며 자신의 인생을 지켜 개인택시기사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원호는 가출청소년들이 자주 모이는 친구의 술집에서 알게 된 휘수와 영화 한 편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지수의 ‘사랑’을 외면한다.
지수의 노래를 높이 평가하며 팬을 자처하면서 그들 주변을 탐색하는 정철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산으로 싸움을 벌이는 가족들을 떠나 유골함을 들고 산 속으로 숨어 들었다. 아무도 모르는 산 속 아지트에서 유골함을 묻기 위해서인지 그저 몰두하기 위해서인지 알 수 없는 구덩이를 파는 정철에게는 아지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신한 부부가 사는 또 하나의 탐색지가 있다. 주변 인물들의 관계와 대화를 살피고 돌아와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우주를 꾸리는 정철의 일상 속에는 자주 아버지가 나타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언을 건넨다.
가수를 꿈꾸기에는 실력도 외모도 마땅하지 않고 늘 읊어대는 랩은 세상에 대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저주를 가득 담은 지수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부모님과의 갈등은 갈수록 깊어간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며 짝사랑을 키워온 원호는 고백을 무시하고, 가출한 밤 우연히 만나 아지트의 유일한 방문자가 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내 ‘친구’가 된 정철의 응원에 지수는 용기 내어 또래 친구들에게 노래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들을 위한 노래라는 부연에도 돌아온 것은 ‘가짜’라는 냉담한 반응, 그리고 지수는 친구들의 생계인 매춘에 강제로 엮이게 된다.
모든 것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원호에 대한 배신감은 지수를 다른 세계로 이끌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고 칭찬해준 정철에 대한 퍽치기로 능력과 배포를 인정받은 지수는 매춘 조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산 속 매춘캠핑장 관리자가 된 지수는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고 업신여기던 친구들을 보란듯이 제끼고 원호가 좋아하는 휘수를 매춘에 끌어들인다. 매춘캠핑장을 세내다시피 하고 있는 유학생 바울은 대학생인 휘수를 파트너로 삼고, 일을 얻고자 찾아온 원호는 자신이 좋아하는 휘수의 매춘과 자신을 좋아했던 지수의 번신을 목도하며 혼란에 빠진다. 이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때로는 조종하고 조작하는 지수는 래퍼의 꿈을 안고 애지중지했던 마이크를 버리고, 자신이 저주했던 세상과 스스로와 주변을 차근차근 침착하게 파괴해나간다.
혼자만의 세계를 선택한 뒤 팬이 되고 친구가 된 지수의 폭력적인 배신에 상처 받은 정철은 아버지의 조언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지수를 수소문하고, 아지트와 멀지 않은 산 속 매춘캠핑장으로 지수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거의 모두가 연루된 파국을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이 닿은 곳은 갓난아가와 함께 있는 부부의 집 앞, 산 속에서 지옥같은 광란의 밤을 겪고 살아남은 그들을 현실에서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고작 119다.
<베를린 천사의 시>와 <파고>, <후회하지 않아>에 심지어 이미지도 아닌 책 <적군파>까지, 보면서 많은 컨텍스트들이 떠오르는 영화였다. 예전 <무산일기>와 gv, <춘몽>에서의 모습을 떠올리며 영화인 박정범이 영화를 통해 구현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많이 궁금해졌다. 대중적인 공감을 희망할 리는 없다고 느꼈지만, 곳곳에 배치한 유머와 블랙코미디적 요소는 외골수의 길을 고집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손을 내미는 기분이었다. 지수 나이쯤을 통과할 때에 느꼈던 세계와 존재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불만을, 그 두 배쯤의 나이를 넘어섰을 감독은 좀더 구조적으로 통찰하고 해석하고 치열하게 취재해서 시청각화한 것 같기도 했다. 세계와 인간의 모순과 타락, 그를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을 어두운 현실에 천착해 그려내고자 한 무척 간절한 작업이었을 것만 같은데, 좀은 중구난방인 이 긴 영화가 안도할 만큼의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수십 년만에 맨 앞 줄에서 본 영화였는데, 가끔은 인물과 화면이 내게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10/6, 롯데시네마센텀시티
24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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