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8. 9. 13. 01:31

 

우연히 인터뷰를 먼저 접했고, '강주룡'이 소설로 쓰여지다니! 신기하고도 궁금한 마음을 품었던 채로 잠시 잊었다. <체공녀 강주룡>, '-'라는 단어가 과잉으로 또 비하로 남용되는 세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작가나 출판사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의아하기도 했지만 뜻이 있겠거니 했다.

 

단식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주룡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소설은 시작된다. 마치 영화처럼 짧고 인상적인 도입부에 붙여 바로 다음은 과거의 어느 날, 무너진 가세에 스무 살까지 노처녀로 있던 주룡이 급히 성사된 혼인으로 낯모르는 열다섯 살의 어린 신랑에게 시집가는 날이다.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배인 대화를 나누며 엄마는 주룡을 단장하고, 또래 동리 처녀들이 이미 다 돌려쓴 원삼과 족두리를 빌렸을망정 신 하나는 주룡에게 꼭 맞는 새 것. 불퉁하고 어색한 마음으로 맞은 급한 혼사에서 처음 본 다섯 살 연하 신랑은 다행히 키는 크고 얼굴은 곱다. 가난에 떠밀려 평양에서 간도 통화현까지 이주해서도 입에 풀칠하기 곤한 주룡네와 달리 대대로 역관을 지내며 제법 여유로운 집안의 둘째 아들인 최전빈을 신랑으로 맞은 연유는, 야학을 다니며 고취된 사상으로 독립군을 꿈꾸는 자제를 만류하기 위한 시댁의 선택이었다. 평양에서 일 년을 채 못 다닌 학교, 제 이름 자나 겨우 쓸 줄 아는 주룡이지만 신랑의 높은 뜻이 새롭게 느껴진다. 그리고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국가에 살기를 바랍네다. 내 손으로, 어서 그래하고 싶었습네다. 동무들하고 약조한 바도 약조한 바이지만은.” 눈물을 참으며 곱고도 아득하게 고백할 줄 아는 어리고 고운 신랑과의 결혼 생활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행복이자 새로운 세상에의 개안이다.

갑작스레 맞닥뜨린 전빈과의 혼인은 서방만 한 게 없다느낄 만큼, 평생의 동무를 얻은 마음이 벅찬 길이었고 주룡은 동무와 함께 야반도주를 감행해 독립군 부대로 떠난다. 거개가 남성인 독립군 부대에서 성에 차지 않는 부엌데기 노릇을 얼마간은 감수했지만, 어리고 고운 신랑을 지키며 독립군으로서의 제 역할도 어엿이 해내고픈 주룡을 알아본 백광운 장군. 주룡에게 탈취한 무기를 안전하게 옮기는 작전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고, 백광운과 부부로 위장한 주룡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하고 후속 작전 또한 성공한다. 갈등과 자조감을 불러올 실수도 있었지만 백광운의 배려와 이해로 여성을 넘어 독립군으로서의 자각과 동지애가 조금씩 생겨나고 활동 속에서 부대 내 주룡의 존재감은 조금씩 커져가는 반면, 가부장제와 구시대적 관습과 사고에 젖어있는 다수의 부대원들 간에는 주룡과 전빈 그리고 백장군을 둘러싼 뒷말들이 떠돌고 이는 결국 주룡과 전빈 사이를 가르는 독이 된다.

서로를 곱고도 어여삐 여기는 사랑스런 부부이자 동무였지만, 어느 날 전빈은 주룡에게 돌아가라 말하고 주룡은 그 길로 돌아서 백 리를 걸어 친정집으로 돌아간다. 신랑 따라 나선 독립군 생활, 급작스레 펼쳐진 신세계의 혼란 속에서도 좋은 신랑과 뜻을 같이 하기 위해 또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설움을 삭여왔던 주룡의 서운함은 그렇게 단호한 이별이 되었다. 혼인조차 없었던 일인 양, 꿈같은 반 년의 독립군 생활은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비밀에 부친 채 친정집에서의 계절이 바뀌고, 어느 날 멀리서 찾아온 독립군 오가의 기별은 전빈이 위독하다는 소식. 그 길로 새벽 내 걸어 당도한 유하현에서 파리하게 식어가는 전빈을 위해 주룡은 자신의 약지를 끊어 피를 먹이고, 잠시 회복된 의식으로 다정한 대화를 나누던 신랑을 떠나보낸다. “임자가 이런 사람이어서 나는 좋았에요.” 주룡이 바로 답하지 못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멈춘 전빈의 남은 온기를 제 몸에 옮기기라도 하듯 함께 잠을 청하고, 다음 날 병문안 온 백광운 휘하 2중대 장정들과 언 땅을 파고 삼베 한 필로 온 몸을 동인 전빈을 묻는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회한 가득한 몸으로 신랑의 죽음을 알린 시댁에서, 독립군 바람 잡으려 시킨 혼인인데 도리어 서방을 죽였다며 실신할 만큼 시어머니에게 맞고 살인죄 누명으로 중국감옥에까지 수일 갇혔다 풀려난 주룡. 거지꼴이 되어 돌아간 친정집 아버지는 자신의 망신을 견디지 못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뒤였다. 가족과 함께 간도를 뒤로 하고 도착한 사리원에서, 그저 일꾼이 되어 묵묵한 주룡을 눈여겨본 후사 없이 혼자된 마음 좋으나 늙은 집주인에게 아버지는 얼마간의 전답과 집을 맞바꾸는 혼사를 다시 정한다. 그리고 더는 자신의 삶을 남들이 좌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로 결심한 주룡은 혼인계약서와 나 죽었다 여기고 잊어주시오.” 한 줄의 편지를 맞바꿔 집에 남기고, 홀홀단신 평양으로 떠난다.

 

모던 껄과 공녀들이 즐비한 신문물의 중심 평양에서, 주룡은 선택의 여지없이 고무공장의 공녀가 된다. 부양할 가족도 양육할 자식도 없는 홀가분한 개인이 되어, 공녀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제멋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관리부장을 일없어하며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마음을 의지해 일하면서 한 달에 한 번은 극장도 가고 비싼 커피도 마시고 모던 껄 그림을 모으며 제법 혼자의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세 든 집의 장녀, 열 살 남짓한 나이에 제사공장에 다니며 동생들 학비를 대는 옥이를 친동생처럼 여기며 마음속 깊이 자리한 어리고 고운 신랑 전빈의 이야기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독립군 생활이며 난생 처음 남녀로 동지로 동등했던, 평양 오는 기차에서 애석한 부고를 알게 된 백광운 장군의 이야기도 털어놓는다. 친동생처럼 새로 얻은 동무처럼 한 이불을 덮고 자며 마음을 보살피던 옥이와의 서먹한 이별을 피하려 기숙사 들어가기 전날에는 새로 만들어진 대동교를 건너는 산보길에 을밀대 구경, 비싼 커피도 함께 나눈다.

일제 자본의 제사공장과 조선 자본의 고무공장이 즐비한 평양, 들쭉날쭉인 물량 따라 노동력 수급이 용이하게 부녀자들을 주로 고용했던 고무공장에서는 잦은 휴업과 임금 감하가 반복되고 이미 이천 명이 넘는 고무공원들을 조직하는 총파업이 시작된다. 비교적 작은 규모였던 주룡의 평원고무공장 공원들도 하나둘 충파업을 준비하는 파업단 천막을 드나들고, 독립군 부대 생활 이후 처음으로 동지라는 말을 접하며 갈등하던 주룡도 먼저 가입한 삼이가 이혼 위협에 눈물로 탈퇴하는 걸 위로하며 마침내 결단한다. “내래 일생을 걸 결심이라야 가입하는 거이 마땅하다 여겨서 여즉 가입 안 한 거이야.”

가입과 함께 특유의 결기와 여유로 결의발언까지 마친 주룡은 이내 운동조직의 주목을 받고, 승리의 전망이 불투명한 총파업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현장 조직에 골몰하던 조선공산당, 평양적색노동조합 결성준비위원회의 인텔리 활동가 정달헌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인다. 공원들을 괴롭히던 관리부장까지 합세했던 총파업이 큰 결실 없이 끝나고, 결의와 혼란 속에서도 학습과 조직에 매진하던 주룡에게 얼마 후 다시 공장주의 임금 감하 일방 통보가 투쟁의 기회로 다가온다. 마흔아홉 명의 파업단을 조직해 천막을 치고 투쟁을 시작한 주룡, 두 배가 넘게 배치된 경찰병력에 맞서면서도 교섭 진전 없이 길어지는 투쟁에 조합원들이 서서히 지쳐가자 단식을 결단한다. 자신의 결단에 모두가 함께하겠다는 결의가 보태져 아사동맹이 결성되고, 경찰의 방심과 어둠을 틈타 공장 진입에 성공하지만 이튿날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나오고 만다. 파업단 조직과 함께 셋집을 뺀 주룡은, 파업 기간 정달헌을 비롯해 동지들이 검거된 조직 사무실에도 제 눈으로 철거를 지켜본 천막에도 갈 수 없다. 오랜 투쟁과 단식으로 기진맥진해 평양 시내를 정처 없이 걸으며, 간도로 어데 멀리로 달아날까 생각하던 주룡의 마음이 닿은 곳은 죽음. 전 재산과 광목 한 필을 맞바꾸고 예쁜 벚나무며 대동강이며 아름다운 죽을 자리를 찾다가, ‘내가 뭐하다 죽은 년인지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예 을밀대에 오른다.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진 흑백사진 한 장.

소설은 그 이후 주룡의 행방을, 정달헌을 면회한 삼이가 전달한 신문기사들을 통해 간명히 전한다. 그리고 이라 이름 붙인 마지막 장, 정달헌의 상상 속 담담한 플래시백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팽팽히 당겨졌던 무언가 툭 끊기듯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삶이란 운명이란 이런 것인가 싶은 간단한 끝. 그리고 바로 옆면에 자리한 짧은 작가의 말까지가 이 소설의 진짜 종착점이 아닌가 싶어졌다.

 

 

투쟁, 이라 말했고, 무엇과 싸우겠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든 것과 불화하며 그 모두와 사랑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이름으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그게 어떤 일인지 알 수 있다. 만나보지 못한 채로 죽은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다시는 미치지 않을게. 다시는 죽지 않을게. 내게 함부로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앞질러가는 약속으로.

 

이 책의 이름은 끝의 끝까지 내 이름의 옆에 놓일 것이다.“

 

한달음에 소설을 읽으면서도 어디까지가 고증된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작가의 상상일까 내심 궁금해지기도 했었는데, 무언가 울혈진 듯 단호하고도 물기 어린 작가의 말에 이 소설에 쏟아 부었을 핍진한 존엄 같은 게 감히 느껴졌다. 책장을 덮으면 줄거리조차도 금세 까먹는 게 일상이라 잊고 싶지 않아 주절주절 적었는데, 실은 그 말고도 기억하고 싶은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사진 한 장과 몇 가지의 길지 않은 기록으로만, 소위 운동진영에서나 알 만한 장면과 이름 석 자로만 기억되었던 강주룡의 삶에 생생한 활기를 불어넣고 굽이진 세계와 함께 성장시키고 그 소멸마저 빛으로 빚어낸 소설가 박서련에게 고맙다.

철원에서 태어났다. 일기와 박물지를 쓴다.”는 삐딱하게 일그러뜨린 젊은 얼굴의 소설가에게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과 큰 세계와 작은 세계를 자유자재로 엮고 잇고 사람의 마음을 굽어보고 읽어내고 펼쳐보이는 재주들이 담겨있을지 궁금해졌다.

 

 

박서련

2018.7.13.초판1쇄인쇄 7.18.초판1쇄발행, 한겨레출판(주)

 

 

 

 

 

'비밀같은바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가 좋다]  (0) 2019.03.10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0) 2019.03.10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0) 2018.09.13
웅크린 말들  (0) 2018.08.08
아픔이 길이 되려면  (0) 2018.08.05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