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1. 4. 9. 22:2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클라라는 남편 몰래 곤히 잠든 두 아들을 깨워 집을 떠난다. 아직 어리지만 이 떠남이 '휴가'라는 거짓말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것 같은 안소니와 주드에게, 클라라는 애써 불안을 숨기고 동경하던 뉴욕에 도착했다는 기쁨의 표정을 내보인다. 제프는 아침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잘못한 것도 없고 아무것도 한 게 없다며 항의하는 그에게 돌아온 해고 사유는 바로 (침대 매트리스를 팔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 벌개진 얼굴로 사무실 의자를 창문 밖으로 던지는 것으로 제프는 분노를 달랜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앨리스는 바쁘다. 잠시 복도로 나온 그녀를 붙들고 환자인 아내에 대해 눈물로 하소연하는 보호자를 진정시키는 앨리스의 눈가도 발갛게 달아오른 것 같다. 정신없이 바쁜 응급실에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간호사, 보호자의 불안과 염려를 위로하는 그녀의 모습에는 진심이 묻어난다.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무작정 도망친 클라라가 처음 찾아간 곳은 아들과 연을 끊고 지내는 시아버지의 집이다. 남편에게는 비밀로 하고 머물게 해달라는 부탁도, 며칠 버틸 수 있게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당했다. 안소니도 때리기 시작했다는 말에 시아버지는 잠시 멈칫하지만 그들 사이에 끼고 싶지 않다며 선을 긋는다. 막막하지만 그대로 돌아갈 수 없는 클라라는, 아이들을 태운 차로 하릴없이 뉴욕 거리를 배회하며 문이 열린 도서관에 아이들을 두고 먹을 것을 구하거나 다음 순간을 위한 도둑질을 한다. 때로 어두운 뒷골목에 차를 세우고 어느 콘서트홀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잠시 취하기도 한다. 

그들이 살아가고 지나치는 뉴욕의 한 구석에는 100년이 넘은 러시아 식당 '윈터 팰리스'가 있다. 고풍스러운 장식에 러시아풍의 메뉴를 고수(하지만 캔이어서 일정한 맛을 유지할 수 있는 캐비어 말고는 대체로 형편없는 음식으로 고전)하는 유니크한 식당의 사장은 창업자의 손자인 티모피다. 이미 노인인 그는 뉴욕 출신이지만 영업과 매출을 위해 러시아 억양의 영어를 구사하며 심드렁하게 식당을 운영하면서 폐업도 고려 중이다. 마크는 자신의 사건을 대리한 변호사 존 피터와 '윈터 팰리스'에서 만났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 존 피터가 먼저 자리를 뜨고 계산을 위해 티모피와 친구들이 둘러앉은 구석 테이블을 찾은 그는 식당의 서비스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엉겹결에 그곳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러시아 출신 이주자들의 모임과 파티가 자주 열리는 식당은 콘서트홀과 가깝다. 우연히 흘러들어와 캐비어를 접시째 핸드백에 쓸어넣었던 클라라가 다시 그곳을 찾았을 때, 마크는 그녀를 눈여겨본다. 

응급실 간호사인 앨리스는 교회에서 매주 '용서 모임'을 운영한다.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용서하고 싶은 이들이 빙 둘러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힐링 모임에는 존 피터를 비롯해 열 사람 정도가 함께한다. 존 피터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오가며 의뢰인을 대신하는 변호사의 일에 대한 냉소를 감추지 않다. 용서 모임에서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크까지 끌어들여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제프는 새로 구한 일자리인 세탁 공장에서도 누군가의 반려견을 세탁물 카트에 넣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잘렸다. 보여진 것 이상으로 잦은 해고를 경험한 듯 보이는 그는 혼자 꾸려가는 생활도 너무나 버겁고, 밀린 월세를 독촉받다가 방에서 쫓겨나고 만다. 추운 밤 갈 곳 없는 제프가 거리를 배회하다 우연히 발견한 교회는 앨리스가 용서 모임을 하는 곳, 겨우 잠자리를 얻은 그는 아침이 되어도 갈 데가 없다. 갈 데가 없는 것은 클라라도 마찬가지, 어린 안소니와 주드를 데리고 '윈터 팰리스' 홀 한쪽의 테이블보 안에 숨어들었다 잠들고만 그를 발견한 것은 다행히 마크다. 마크의 배려로 클라라와 아이들은 식당 꼭대기 마크의 거처에서 지낼 수 있게 되고, 마지막에는 스산하게 거리를 떠돌던 제프도 '윈터 팰리스'에 벨보이로 함께한다.  


영화는 폭력적인 남편을 피해 무작정 떠나온 클라라와 두 아들이, 거대하고 화려한 뉴욕에서 내몰리고 떠밀리며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과 조우하며 펼쳐지는 우연을 따라간다. 제프가 내던지고 안소니와 주드가 발견해 타고 놀고 클라라가 길가 어딘가 놓아둔 후 존 카터의 비서가 주워가는 의자처럼, 영화의 인물과 에피소드도 부분부분 맞닿아 연결되고 한 사람의 화자가 여럿의 청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각조각 전하면서 관객에게도 전달되어 맞춰지는 이야기의 전모가 신선하게 와닿았다. 늘 마음을 다해 애쓰는 앨리스의 "무슨 권리로 그렇게 불친절한가요?"라는 말이 또렷하게 다가왔고, 연결된 삶에 친절이 더해질 때 생겨나는 의미와 시작되는 변화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의 불안정함과 누군가의 자리를 내어주는 친절이 산술적인 교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영화에 등장하고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여러 공간들의 의미도 새로웠던 것 같다. 얼마 전 [모리타니안]으로 알게 된 타하르 라힘의 새로운 모습이 반가웠고 앨리스 역의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제프 역의 칼렙 랜드리 존스는 기억하고 싶은 배우가 되었다. 등장씬이 많지는 않지만 빌 나이가 있어서 더 든든한 기분도 들었다. 언젠가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4/9 롯데시네마통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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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