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1. 1. 2. 12:25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갓난아기 때 버려져 부모 없이 자란 복서 레오,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어 권투를 하기에 시합에서 이겨도 기쁨의 세레머니 따위는 없고 심드렁하다. 어느 날 링에서 ‘럭키 펀치’를 맞고 쓰러져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뇌종양 선고와 함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견을 전한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거리를 배회하다 만난 점쟁이는 그에게 남을 위해 사는 게 좋은 운명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생하고 팔팔하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어릴 적부터 폭력과 학대를 일삼던 아버지의 빚으로 인해 조폭에게 팔려 감금된 채 조건만남으로 몸을 파는 모니카, 아버지는 종적을 감췄지만 마약중독인 그녀의 눈 앞에는 벌거벗은 아버지의 환영이 수시로 나타나고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던 그녀를 위해 아버지를 때려눕혔던 동창생 류지 역시 구원의 환영처럼 이따금 나타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존공영'을 모색하는 어둠의 세계, 고집을 꺾지 않은 신주쿠의 무력파 야쿠자는 세를 확장 중인 중국 조폭들과 몇 년째 대결 국면이다. 싸움에서 중국 조폭두목의 팔을 자른 실세 곤도와 외팔이 왕이 출소하자 양 집단의 긴장은 고조되고, 쇠락해가는 야쿠자 집단에서 개죽음을 당하느니 은밀히 거래 중인 마약을 빼돌려 한 몫 챙기고 양자의 혈전을 피해 2-3년 조용히 감옥에 다녀와 새 삶을 모색하려는 카세는 부패한 형사와 공모해 새로 들여오는 다량의 마약을 빼돌릴 계획을 세운다. 조폭이 관리하는 아파트로 마약을 운반한 야스를 죽이고 형사는 1박 2일 조건만남으로 모니카를 밖으로 빼돌리고, 야스의 애인 주리는 중국조폭을 고용해 빼돌려 죽이는 계획. 

카세는 야스를 죽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괴력의 주리는 중국조폭을 죽여버리고, 형사와 거리를 걷다 아버지의 환영을 본 모니카는 공포에 질려 달아난다. 마침 그 거리에서 현실과 다른 점쟁이의 이야기에 화가 났던 레오는 모니카를 뒤쫓는 형사를 때려 눕히고, 연락이 닿지 않는 야스의 주검을 발견한 주리는 오열. 야스의 죽음을 전해들은 야쿠자들은 아파트에 모여 복수를 다짐하고 두목은 카세에게 주리를 집까지 데려다주라고 한다. 깨어난 형사는 카세를 의심하고, 옆자리에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주리를 데려다주던 카세는 계획이 들통날까 주리를 기절시켜 집으로 들어간다. 예상 밖의 동거인에게 발각되자 화재사고로 모든 걸 은폐하려 하지만 불사조 주리는 다시 살아나 야쿠자들에게 카세가 야스를 죽인 범인임을 폭로하고 제 손으로 카세를 죽일 다짐을 한다. 

야스를 덮치는 카세를 목격한, 중국조폭과 내통하는 또다른 야쿠자는 주차장에서 카세를 협박하다가 카세에게 살해되고, 얼결에 모니카/유리를 돕고 거리에 함께 있게 된 레오는 순수하고 불행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부모가 없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우연히 도움을 주었을 뿐 함께할 이유는 없지만 어쩐지 마음이 쓰이는 유리를 위해 레오는 류지를 만나러, 아버지가 정말 종적을 감췄는지 확인하자며 슬쩍 함께한다. 지하철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는 벌거벗은 아버지의 환영에 몸을 떠는 유리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빠른 비트의 음악이 나오는 이어폰을 한 귀에 꽂아주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고 비트에 맞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춘다. 공포에 질려 울다가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실소하는 유리에게 레오는 묻는다. “웃기지만 괴로워?” “괴롭지만 웃겨?”   
  
그렇게 찾아간 폐허가 된 옛집에서 유리는 어린 시절 두려움에 질린 자신을 마주하고, 그러나 그 사이 마약을 훔쳐갔다는 의심으로 모니카를 좇던 중국조폭과 카세와 형사가 동시에 당도하며 한밤의 질주가 시작된다. 영문을 모르고 카세와 형사의 차에 동승한 레오와 유리는 마약을 차지하고 카세를 죽이려는 야쿠자와 중국조폭의 전쟁에 휘말린다. 출동한 경찰들이 포위한 쇼핑몰과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싸움 속에 유리는 위험에 처하고, 시한부 선고 후 삶과 죽음이 무의미해진 레오는 유리를 지키고자 한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식당에서 피단을 까던 권투선수를 알아본, '인의'를 중시하는 중국조폭 여인의 묵인으로 둘은 목숨을 건진다. 곤도의 차에 동승해 뜬금 애니메이션을 통해 현장을 빠져나온 레오와 유리가 닿은 곳은 새벽의 거리, 흥건한 물기와 핏자국을 지우지 못한 몰골의 둘은 교차로 건너에 선 임신한 아내와 류지를 마주친다. 지옥 같은 삶의 유일한 구원으로 현현했던 류지는 누군가의 남편이자 미래의 아빠로 실재하고 있었다. 광기의 밤을 통과한 둘에게 평범한 세상은 새로운 세계다. 

범죄극을 거의 보지 않음에도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소메타니 쇼타 때문에 선택했는데, 너무 잔인한 몇 장면을 빼고는 시종일관 눈을 뗄 수 없이 재미있게 봤다. 어이없지만 정교하게 구성된 우연과 돌발 상황, 궁극의 예언이 되는 대사의 연쇄고리를 따라 펼쳐지는 좌충우돌 상황 전개가 기발하고 흥미진진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평범한 삶을 향한 몸부림, 레오와 유리를 감도는 애잔하고 아련한 공감,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며 패퇴의 길을 걷는 야쿠자의 순정 같은 것들이 다른 차원의 세계를 한 궤로 엮어 희한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정신없이 폭주하던 영화가 닿은 마지막 씬은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평화로운 꿈처럼 카메라에 멀리 잡힌 레오와 유리의 모습은 울컥 아름다웠다.  


12/20 cgv영등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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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