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은유가 아니었다. 어떤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나'는 건축가 블랙스미스의 수첩을 의지해 여러 행성을 떠돌고 있다. 수첩에는 행성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인상이 적혀 있다. 행성의 이름은 별자리, 주인공은 수첩에 쓰인 내용들을 참조해 별을 살피고 기록하며 다음 행성으로 나아간다. 어려서부터 '천계도감'을 끼고 산 나에게는 경계없이 흐르는 외계의 많은 것들이 낯설지 않다. 어린 왕자가 떠돌던 때보다 행성의 특징과 자연 환경에 대한 지식도, 각종 우주 생명체들에 대한 지식도 많이 쌓였다.
나에게 행성 표류는 생을 건 모험이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 같기도 하다. 표류하면서 만나는 갖은 존재와 현상은 기존의 인식을 뒤흔들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과 재난도 이어진다. 하지만 왼쪽 골반에 빼곡한 점들을 은하수라 불러준 엄마, 운명론을 맹신하는 집에서 태어나 ‘몸에 은하가 흐르고 유전자에 외계가 섞여’ 있다고 믿어온 내게는 낯설고 두렵기보다 흥미진진한 일이다. 나에게는 행성의 생명체뿐 아니라 행성 자체가, 별자리나 그리스로마 신화처럼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들 역시 모성母星을 떠나 만난, 나를 비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길동무다.
낯선 단어와 감각으로 인식을 교란하고 전복하는 표류기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세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유려하고 자연스러웠다. 나가 표류하는 행성들에서 종이비가 내리고, 각진 바람이 불고, 구름의 뼈가 만져지고, 하늘과 바다가 뒤집히고, 알에서 나무가 태어나는 일은 놀랍지 않다. 오네이로이상제나비나 호리병해파리 같은 이름의 생명체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싶어 검색해 보았는데 결과는 책과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작가는 오랫동안 우주와 외계를 마음에 담고 상상하고 그려보고 쓰는 데에 시간을 들여온 사람일 것 같다.
나가 행성들을 떠돈 지는 이미 수백 일이 지났다. 날짜는 알 수 없지만 Dday를 기준으로 얼마가 지났는지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시인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D+∞ 표기 아래 교차한다.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와 37일을 인큐베이터에서 살고 떠났다는 오빠의 존재, 어렸을 적 잠시 키웠던 병아리의 작은 무덤을 마음에 담고 지냈던 일, 동아리 사람들과 몰려다니며 마시고 취하던 시절의 기억 같은 것들. 동시대와 알 수 없는 시대를 떠도는 두 겹의 나가 만나는 지점은, 알 수 없는 세상을 표류하며 살아가는 시인의 심연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제목은 삶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기도 했다.
지난해 봄 처음으로 RCE세자트라숲을 찾아갔을 때, 묘석처럼 누워 있는 시비를 마주쳤다. 예기치 못한 부재의 징표에 조금 숙연한 마음이 되어 "태몽집"이라는 시를 읽고 시비 곳곳에 새겨진 활자들을 유심히 읽었었다. 알 듯 모를 듯한 생사의 비의를 담은 것 같은 무거운 시 옆에 “여긴 여름이야, 거긴 어때?” 새겨진 문구가 가볍고 상쾌했는데,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빨대가 꽂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있어 괜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숲에서는 애잔한 마음이 되었지만 잊고 지냈었는데, 이 책 덕분에 시인을 다시 만났다. 유고 산문이라고 되어 있지만 기나긴 시 같은 느낌이었고, 그는 짧은 현생을 오롯이 시인으로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싶다. 세계와 우주를 경계없이 사유하며 끝없이 여행하는 영혼, 표류하며 단련된 자유로운 감각과 인식으로 여행은 경이롭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여정이 되지 않을까. 지구별에서의 생을 마감했을 뿐 시인은 어디에선가 다른 존재로 유영하며 기록되지 않은 표류를 이어가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마무리는 분명히 있어, 엄마.” 언젠가 그 길의 끝에 섰을 때 시인이 다시 한 번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희준
2021.7.15.초판1쇄인쇄 7.24.발행,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