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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관 기술자 발레로는 아내가 운영하는 출장 수리업체에서 일한다. 짝꿍처럼 함께 일하는 선배 펩은 은퇴를 앞두고 있고, 일자리를 찾던 모로코 출신의 마호메드가 견습공으로 들어온다. 괄괄하고 직선적인 편견왕 발레로는 마호메드에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쫓아버리고 싶어 하지만, 사장인 아내는 그의 경력이 마음에 든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다.
마호메드의 첫 출장 실습처는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의 집이다. 마호메드에게는 주택 외부에서 배관을 수리하는 발레로와 펩의 신호에 따라 주방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살피는 역할이 주어지지만, 할아버지는 자꾸만 말을 걸고 자신이 선호하는 장수 음식과 건강 체조를 선보이는 등 일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든다. 난처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마호메드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고객들이 싫어할 거라던 발레로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후에도 이런 상황은 반복되고 심지어 사진 스튜디오의 에어컨 수리에 함께 나갔던 마호메드는, 그의 매력을 발견한 작가의 눈에 들어 잠시지만 모델이 되는 반전도 펼쳐진다.
견습기간 일주일은 모하메드에게도 발레로에게도 긴 시간이다. 수리를 위해 방문하는 장소와 그곳의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고 크고 작은 사건이 잇따른다. 철 없는 쌍둥이 자매의 집에서는 베란다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무개념 가족들이 아무 언질도 없이 안으로 문을 닫아 걸고 외출을 한다. 꼼짝없이 갇혀버린 두 사람의 불편하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지만, 점심 시간이 되자 발레로는 하나뿐인 도시락을 마호메드에게 건넨다. 그렇다고 둘의 관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사건건 마호메드를 트집 잡는 발레로는 일 못하는 후배를 함부로 대하고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을 무례하게 표현하는, 그러나 굶어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를 먼저 챙길 줄은 아는 보통의 중년 남성이라는 점이 드러났을 뿐이다(아니,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거구이자 비만인 발레로에게 자신의 도시락을 건네는 건 큰 결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출장지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고 마호메드는 일을 그만둔다. 마호메드는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셰어하우스에 살고 있다. 이주노동자를 환영하지 않는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친구들 역시 사회의 주류에 대한 적대적 감정과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마호메드는 불만에 찬 친구들과는 다른 태도로 발 딛은 땅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고 어학 공부에도 신경을 써왔지만, 집단의 위계는 공고하다. 출장지에서 하나의 이례적 존재로 친밀감이나 환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생존과 미래의 불안은 친구들과 다를 바 없다.
마호메드가 그만둔 후, 스튜디오에서 잠시 모델이 되었던 그의 사진이 업체에 도착한다. 사진을 전하기 위해 마호메드를 찾아간 발레로는, 거실 소파에서 그의 친구들과 잠시 함께하게 된다. 이주노동자들이 말을 알아듣든 말든 스페인어로 떠드는 게 당연했던 '모든' 장소들과 여기는 다르다. 마호메드의 친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네들의 언어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발레로를 힐끗거리고 웃기도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아가는 마호메드와 친구들이, 자신들의 셰어하우스가 아닌 모든 곳에서 겪고 있는 일상적인 배제 상황에 잠시나마 발레로도 놓인 것이다(영화에서 강조되지는 않지만 비만인 발레로 역시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했을 수 있다. 이 장면은 '관습적인 표준'에서 멀어진다면 무엇이든 차별 요인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관계가 역전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접할 차를 준비해 나타난, 매너를 잃지 않은 마호메드가 그 순간 발레로에게는 고맙고 반가운 존재였을 것이다.
드라마 장르의 영화를 좋아해서 소개를 읽고 잔잔한 재미를 기대했는데 편안하기는 했지만 밋밋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편안하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단연 이 작품이다. / 놀랍게도 실제 배관공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연기했다.' 라는 소개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동했는데, 결과적으로 절반만 인상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이주와 관련된 영화들을 은근히 많이 봐서 그럴까도 싶었지만, 흥미진진한 갈등이나 드라마틱한 사건까지는 아니라도 영화 자체에 고유한 개성이나 새로움이 없기 때문인 것도 같다. 약자를 두둔할 줄 알고 강자에게 조용한 조언을 건네기도 하며 중용을 지키는 고참 기술자 펩의 캐릭터는 좀 마음에 들었지만 그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뭐랄까, 그냥 좀 김이 빠지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가 있고 난 보았다.
10/13, cgv센텀시티5
https://www.biff.kr/kor/html/archive/arc_history_2_view.asp?pyear=2021&s1=359&page=3&m_idx=55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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