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10. 19. 01:09

 희망버스 끝나고 너무나 피곤하여서, 일요일 오후 첫 번째 영화로 예매했던 "JAMDOCU강정"은 날려버렸다. 대신 부산에 있는 동안 신세 지는 친구랑 든든하게 저녁을 먹고 근처 금정산 산책으로 워밍업. 그리고 첫 영화.

  
1986년의 모스크바가 배경이란 말에 너무 혹한 탓이겠지만... 예매하면서는 은연중에 "굿바이레닌"을 떠올리기도 했는데 딱히 비슷한 건 없었고, 그저 유쾌하고 귀여운 성장영화였다. 오랜만의 piff(여전히 내겐!) 순례를 시작하기에 적절한, 가볍고도 따뜻한 영화.
 

  
 아버지의 부재가 남긴 빈 자리를, 마음을 사로잡은 춤의 신 바리시니코프로 채우고 멋진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 푸시킨. 비록 그의 현실은 동급생 남자애들에겐 갈굼 당하고 여자애들에겐 파트너 기피대상 1호에 선생들에겐 구박 받는 미운오리새끼지만... 전혀 기죽지 않고 오히려 꼴찌 신세를 역전시키려 자타 기만의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게다가 학교 밖에서 뿜어내는 어엿한 소년범의 포스는 가히 이중생활자 부럽지 않은, 앙큼함까지 겸비.
 
 바라시니코프씩이나 갖다 붙이며 기대치를 잔뜩 부풀려 놓은 상상 속의 아버지.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증명이나 하듯 불법외환거래 혐의로 감방을 다녀 온 아버지와의 첫 만남 그리고 이어지는 부자 간의 관계회복 노력들. 적잖이 안이하긴 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톤으로 봐서는 그럴 듯 한 데다가 섣부른 해피엔딩을 자제한 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사필귀정처럼 발레리노의 꿈이 좌절된 후 '쉽게'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어른이 된 푸시킨 보리스가 소시적 꿈이었던 볼쇼이극장의 주인공 대신 공연의 서포터로 이름을 올린 것도, 나름 실용적이고(?) 유쾌한 결말. 훗날 뉴욕에서 만난 바리시니코프를 '굳이 아는 척 하지 않은' 것도,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도 어른인 나로서 충분히 이해가 되는.
 
 어쩌면 누구나 소시적 마음의 우상을 통해, 그 추상의 그늘 아래 삶을 견디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홀로 서야 하고 더 이상 현실을 버티는 일에 타인을 향한 마음이 실제적인 힘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깨달으면... 그렇게 철이 들고 어른이 되며 세상과 홀로 마주하는 것. 문득, 나의 바리시니코프였던 아저씨가 떠올랐다. 지금의 그가 어떻게 살아가고 나와 무슨 관계인지와 무관하게, 한 시절의 나를 살게 한 고마운 존재.

 영화로 유명세를 탄 뒤에도 훌륭한 발레리노가 되기 위한 묵묵한 훈련에만 열중하고 있다는 귀여운 소년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 어른 조연들의 편안하고 코믹한 연기도 좋았다. 영화가 끝나고 이어진 GV에선 영화만큼이나 유쾌한 전직 발레리노 감독이 등장해 관객의 요청에 무려 턴! 씩이나 선사.  

 
2011.10.10,
영화의전당 중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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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