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36






새해 벽두부터 예매하고 기다렸던 '마법사들'을 보고야 말았다. 오후의 외부회의 뒤풀이로 걸친 맥주 한 잔에 7시부터 불콰해진 얼굴로, 술냄새 담배냄새를 폴폴 풍기며 몸을 실은 1호선.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보니 급히 마신 술기운이 온몸에 노곤하게 퍼져있다. 나름대로 딱 '마법사들' 볼 컨디션이라고, 몽롱하게 반가운 마음이 되어 대학로 당도. 얼마만의 나다인가, 오버스런 감회에 젖기도 했지만 역시나 대학로는 너무나 먼 걸음이다.
 

'파니핑크'의 주술사를 연상시키는 그녀, 유영하듯 흐르듯 경계에서 흔들리는 존재감을 발하는 연기는 참으로 쉽지 않은 경지일 거라고 이해하기로 한다. 열두 군데도 더 '실비아'라는 이름을 붙이는, 아삭거리는 사과 씹는 소리에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호흡하는 공기와도 불화하는 듯한 제정신이 아닌, 그런 영혼이 분명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날 그렇게 몰라?" 발작하듯 자해하는 그녀의 외로움보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감독의 속내가 솔직히 더 궁금했다. 어쩌면 닳고 닳은 이야기, 그러나 닳아지지 않는 이야기. 존재한다는 고통, 영혼에 배인 상처, 남겨진 자들의 안 사는 것 같은 삶.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건네는 게 반갑기는 하지만, 이제 나도 나이를 먹는 걸까. 내심, 어쩌라고...
 

'밥을 먹었으면 바루를 씻게나', 3년 전 스노보드를 맡기고 '문득' 출가한 스님이 다시 속세로 나서며 마법사 까페를 찾아와 전한 화두다. 그렇지, 밥을 먹었으면 밥그릇을 씻어야 한다. 그 당연한 한 마디를 돌아오는 길 내내 곱씹었다. 그러나 그 말은 어찌됐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 뿐, 주체할 수 없는 생을 스스로 마감한 자들에게는 가닿지 않는다. 화두를 배반할 수 없음이었을까. '천개의 불안, 하나의 희망'을 되뇌이다 떠난 그녀를 위한 위령제이며 진혼곡이었던 그들의 피날레가 나는 어쩐지 석연찮았다. 결국 살아가는 것은, 물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지만. 송일곤마저 이렇게 노골적으로 '희망'을 외쳐버리면, 솔직히 좀 맥빠진단 말이지.  





2007-01-11 01:29,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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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