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본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사실 별 기대는 없었고. '러브액츄얼리' feel이라는 말에 마음이 조금 끌렸던 게 다였지만, 정작 나는 '러브액츄얼리'를 보려고 벼르다 놓쳐버렸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조그만 상영관은 사람들로 꽉 찼고, 극장에 자리를 잡고서야 슬슬 안정이 되어서 영화에 집중 시작. 감독이 민규동이었구나, 것두 몰랐다. 민규동 감독을 잘 아냐 하면, 절대 아니고. 예전에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했던... 그야말로 반했던 시절이 있어, 타이틀롤을 본 순간부터 갑자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뭐라고 꼭 찝어 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차이들이지만, 정말로 반갑고 고마운 코드들이 있다.
영화는... 아~주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야 살펴본 전단지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는 빨간 테두리를 두르고 '이 영환 정말 새롭고 행복해요!' 라고 말하듯이 온갖 톡톡 튀는 달콤한 사랑의 표어들을 늘어놓으며 발랄을 부리고 있었지만, 영화는 내게 분명 그 이상의 느낌이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었기에 초반엔 적어도 오분에 한 번은 웃음을 터뜨리게 해주는 대사의 감칠맛에 빠져있으면서도 파편적으로 등장하는 인물군에 대해 파악하느라 바빴는데, 요일별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이틀쯤 지나자 지인으로부터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대략 여섯 가닥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진행이 되는데, 전혀 난삽하지 않고 거의 억지스럽지 않았으며 에피소드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우연으로 교직되어 있었다.
예전에 언젠가 회자됐었던 '케빈베이컨의 육단계'였나 하는 것, 어떤 배경에서 나온 이야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여섯 다리쯤 거치면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식으로든 연결이 되어있더라는 뭐 그런 거였던 것 같은데. 사실 살면서도 몇 다리 걸쳐 아는 사람들이 서로 아는 사람이고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 좁다는 실감을 하는데... 굳이 그 단계설(?)을 갖다붙이지 않더라도, 영화는 너무나 그럴 듯하게 등장인물들간의 인연과 우연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대략 두 세명의 중심관계와 그로부터 뻗어나간 가지들을 사건과 결합시키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사건 내지 감정의 반향이, 이전에 있었던 어떤 장면에의 연상으로 이어져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놀라운 솜씨. 반전이나 스릴이 주요소는 전혀 아니지만 정말이지 촌스럽지 않게 암시와 복선을 잔뜩 뿌려놓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형식의 건조함에 매몰되지도 않았고, 영화의 구조에 배우나 사건이 희생되는 느낌도 없었으며, 심지어 중간에 두어 번은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감동마저 있어주셨다. 아, 이런.
영화가 전면에 내세운 것은 흡사 '해피엔딩의 사랑'이었고 정말 갖가지 세대와 유형을 아우르는 사랑이 등장했으며, 에피소드의 반 이상은 코미디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충분한 웃음을 자아내게 했지만, 보는 동안 더 진하게 마음에 다가온 느낌은 세상살이의 지난함과 쓸쓸함 그리고 인간됨의 어려움과 피할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 뭐 그런 것들이었다. 문득 보고난 후의 마음이 대책없었던 '세기말'의 감상이 떠오르기도 했고, 누군가들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케잌 조각 자르듯 딱 잘라 그 단면을 보여주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 장식 뒤에 정직하게 들어차 있는 아무 무늬없는 빵조각의 담담함 같은 것. 달콤한 크림을 손가락으로 혓바닥으로 발라먹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하게 되는 처치곤란의 별 맛없는 빵덩이 같은, 때론 케잌 고정대에 긁혀 상처 난 밑바닥을 보이기도 하는, 그런 어린 시절의 케잌 말이다.
낮에 놀다가 영화 홈페이지에도 들어가봤는데, 뭐랄까. 때로 마케팅은 내용과 본질(?)을 참을 수 없도록 가볍게 만드는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상품인 세상에서, 특히나 아무런 생산성도 유용성도 없다고 치부되는 감정이라는 걸 매끈한 상품으로 포장하는 방법은, 이왕이면 말초적인 가능하면 돈 되는 방향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리고 뭐 이 영화 자체도 한참 뜨는 황정민, 정경호, 윤진서를 비롯해서 나름 안정권에 있는 엄정화, 임창정, 김수로 등까지.(물론 관록있는 중견 주현, 천호진, 오미희와 연기파 서영희, 전혜진 그리고 심지어 슬픈 애어른들인 아역들까지도 훌륭했다.) 스타시스템이라고까지 몰아붙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상업 영화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영화도 아닌 바에야, 피할 수는 없는 거겠지. 물론 영화라는 것 자체가 가장 소구력 있는 문화컨텐츠라는 걸 생각하면, 그저 나의 정화(?)에 따라 영화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의 기대 수준이 맞춰지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 없는 바람이겠지만. 음.. 약간은 아쉬웠다.
근데, 정말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맞나. 대체로 긍정적이고 행복한 결말을 암시하며 끝이 나기는 했지만... 대략 절반 쯤은, 캐릭터 하나하나가 버텨내야 하는 남은 삶들이 나는 진심으로 걱정되고 씁쓸했는데.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그보다 더 많은 감정들이 오고가는 일상의 실체를 하나하나 분석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어쩌면 사람람들에게는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려는 욕망이 더 크게 작용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은 혼자된 마음이 느끼는 일상의 신산함과 사는 일의 버거움 같은 것들이, 황홀하게 빛나는 순간의 벅참보다 훨씬 더 집요하고 질기게 마음바닥에 달라붙어 센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 보면서 잠깐 그런 생각도 들기는 했다. '가장 아름다운'이라는 당당한 수식어가 붙은 이야기를 보면서도, 지배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지지부진한 생각들이 혹시 나의 원형질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얼마 전 타롯카드 아저씨가 충고(?)했던, '마음을 바꿔먹어야죠, 노력을 해야죠'라는 말이 귓전에 들리는 듯한. 아무려나, 영화는 좋았고. 내 감상을 위주로 조금 덧붙이자면 '내 생애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일주일'쯤 되겠다.
2005-10-10 00:34,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