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 봤다. 예전에 연극으로 할 때 입소문만 듣고 넘겼다가 영화로 만드는구나, 했는데 벌써 칠백만 돌파 어쩌고 하더구만. 사실 마스코트처럼 전면에 내세워지는 강혜정은 별 호감이 안가는 편이라 그저 그랬는데, 다른 거 다 제쳐두고... 남북군이 마음을 합쳐 연합군을 물리친다(?)는 내용 하나만으로도 응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기는 했다. 짧은 연휴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보내기는 그렇고.. 마침 윤대녕님의 새 소설을 흔쾌한 마음으로 읽고 난 터라 영화도 한 편? 하던 차. 실은 개봉하자마자 '외출'을 보리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같이 보는 친구의 취향을 고려하다보니 '..동막골' 끝물에 나도 합류를 하게 됐다.
영화는.. 좋았다. 개봉 직후 영화 좀 본다하는 지인들로부터 그저 그렇더라~는 전언을 들었던 터라 별 기대가 없던 탓이었는지 모르겠고, 씨네마테크 드나들고 영화제까지 좇아다니며 영화를 봐대던 예전에 나로부터 너무 멀어져 (혹시 그런 게 있었다면) 영화를 보는 눈이 무뎌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수묵의 느낌이 나는 타이틀롤이 우선 마음에 들었고,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동막골 풍경이 편안했다. 주로 무대에서 봐왔던 배우들이 늠름히 스크린을 채우고 있는 것도 꽤나 기분 좋은 일이었고, 무엇보다...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만치 순수한 동막골 부랑민들의 모습. 서로를 향해 겨눈 총부리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그 어떤 절체정멸의 순간인지도 미처 모른 채 태연히 멧돼지가 출몰하는 감자밭을 걱정하는 그들의 아연한 순수함. 이해관계와 권력(?)을 동시에 가진 자들을 오히려 포박하는 듯한, 그 순진한 집단의 힘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순간 어이없게도, '조용히 하고 선생님 말 좀 들어보라'며 잔뜩 격앙되어 소리치는 나의 모습과 자기들끼리 즐거워 어쩔 줄 모르며 자지러질 듯 떠들어대는 공부방 꼬맹이들이 공존하는 공부방 풍경이 떠올랐다. 세상이 다른 사람들, 그런 것인가?
사실 좀 진부하고 도식적인 면이 없지는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이 이렇게나 많은 터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어찌 있을 수 있겠냐마는... 강혜정이 분한 꽃순이는 '그섬에 가고 싶다'의 심혜진 캐릭터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고(설마 오마쥬?), 이상한 오리엔탈리즘(?)인지 모르지만 동막골 부락민들의 원초적인 에너지와 생명력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에밀쿠스트리차의 영화들이 떠올랐다. 떠들썩하고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정연히 흐르는 어떤 질서, 문명이 채 당도하지 않은 원시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순수의 주술 같은 것들. 뭐, 아니라면 말고. 아무려나, 문득 에밀쿠스트리차의 영화들이 그리웠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은 너무 거창하다는 느낌이었지만, 한 편 예견했는지 모르나 칠백만 돌파와 조금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실은 무엇보다 부럽고(?) 박수쳐 주고 싶었던 건, 놀랍도록 다양한 재능의 스펙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시니컬해보였던 장진으로부터 나온 작품이 그토록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바름(?)을 향해 있다는 부분이었다. 쌩주제넘음이라 누가 욕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영화만한 파급력을 가진 문화컨텐츠가 어디 있으랴는 데에 생각이 미치면, 이렇게 슬프고도 아름다운 반전 영화. 심지어 통일도 생각나게 하는 감동적인 영화가 연일 스크린에 펼쳐지고 몇 백만이 본다는 것은 분명 가슴 벅찬 일이다. 감동의 양상은 완전 다르겠지만, '외출'도 나에게 힘을 주기를.
2005-09-20 00:59,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