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20. 00:58






다들 한풀 꺾였다고 할 즈음부터 나는 더위를 견디기가 무지 힘들어졌다. 더위 먹었을 때의 증상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대략 내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다면 목요일 쯤부터는 아무래도 더위를 먹어버린 것 같고. 도저히 안되겠어서 전기값도 나몰라라 연일 몇 시간씩 에어컨을 켜대고 있다. 심지어 어제는 침대에서 잘 수가 없어 에어컨이 있는 책장 밑에 자리를 펴고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 탓인지 오늘 내내 귀는 멍멍 아프고 침 넘길 때마다 목 안쪽도 욱신거리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아, 정말 컨디션 참 아니다.
 

토요일 저녁엔 늦더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영화를 보러갔다. 다행히 집에서 5분쯤 거리에 영화관이 하나 있어, '괴물'도 여태 못(?) 본 친구에게는 미안했지만 '다세포소녀'. 원작 만화는 본 일이 없고, 그저 이재용 감독과 장영규의 음악에 기대어 어쩐지 봐줘야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제 돈 다 내고 본 영화, 무슨무슨 할인제도 없어지고 나니 내게는 영화 한 편 보는 것도 사치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는... 14,000원어치 내가 착한 일을 한 듯한 느낌도 가져다주었다. 그래, 일단 작은 영화는 살려야지. 화면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주변 객석에서는 뭐 이런~ 환불~ 허허~ 무슨 영화가~ 등등의 다양하지만 한 방향을 향하는 반응이 들려왔다. 음... 그러고보니, 실은 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는데.
 

줄거리나 캐릭터는 포털에 워낙 자주 등장했었는데, 그래도 다시 살짝 이야기를 꺼내자면 이렇다. 영화의 배경은 일명 종교자유시범학교라는 무쓸모고등학교, 성병으로 결근한 영어샘 대신 들어왔다며 모종의 관계를 맺은 학생은 조퇴하고 병원에 다녀올 것을 친절히 안내하는 교실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리를 지키던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은 우왕좌왕 모두 빠져나가고 결국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와 외눈박이만이 남게 된다. 그나마 원조교제 약속으로 자리를 뜨는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겨진 외눈박이.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유치찬란 핑크로 무장한 무쓸모걸들의 발랄한 교가제창과 함께하는 학교와 인물 소개.
 

그리고는 다 기억하기도 힘들만큼 어지럽게 교직된 에피소드들이 때로는 유기적으로 때로는 썡뚱맞게 전개된다. 스위스전학생 안소니를 마음에 품은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의 연정과 가슴앓이, 교내 유일한 숫총각이며 왕따인 좌절인생 외눈박이의 욕망과 그를 남몰래 사랑하는 축구부주장, 어이없게도 트렌스젠더인 두눈박이에게 마음이 꽂혀버린 안소니의 방황과 갈등, 왕칼언니와의 플라토닉 원조교제(?)로 너절한 생을 위로받던 중 우여곡절 끝에 흔들녀로 유명세를 타게 된 가난을 등에 업은 소녀, 여학생들에게만 인스턴트 모범생칩을 장착시키며 분위기를 문란케하는 이무기와 그에 맞서는 학생들, 덕 좀 볼까 싶어 어릴 때 스위스로 입양을 보냈으나 별 소득 없이 돌아온 제임스와 엄마의 상봉 그리고 지겹게 등에 업고 다녔던 가난과의 이별.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으며 나름의 에피소드마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우리 사회의 각종 문제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비판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만, 그건 아무래도 좀 우스꽝스럽기도 난망하기도 한 정색이 아닐까 싶다. 암튼, 이런 잡다한 에피소드들을 거치고 거쳐 마침내 졸업식날의 엔딩. 종교자유시범학교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지켜낸 말 그대로 무쓸모고의 정체성은 변함없이 키치가 난무하고 어이는 사라진 광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만다. 
 

대략 어떤 영화일 것이란 짐작은 있었기 때문에, 황당하고 설득력 없는 상황에 대한 당혹감은 별로 없었다. 단, 이재용과 장영규라는 믿음직한 이름에 너무 많은 기대를 걸었던 것 같기는 하다. 아니 뭐, 장영규와 복숭아의 음악에는 별 불만 없다. 그런데 이재용은 왜 굳이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정사'와 '순애보'와 '스캔들'이 풍기는 각각 다른 분위기를 생각하면, 그는 다방면의 선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차마 '록키호러픽쳐쇼'나 '크라이베이비' 까지는 아니라도, 사실 살짝 기대가 없지는 않았는데...
 

원작이 가진 키치적인 요소나 말도 안 되는 전개 같은 것은 작품의 색깔로 넘긴다지만, 대략 발랄하고 어디로 튈 지 몰라야만 할 것 같은 상황의 팔할 이상이 예측가능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진부하고 허탈한 유머(?)로 귀결되고 마는 것은 정말 아쉬웠다. 더구나 온통 과장된 설정으로 일관된 영화이기는 했지만, 이따금 관객과 눈을 맞추는 소격효과까지를 염두에 뒀다면 안소니와 테리와 우스의 경우는 아무래도 연기 연습을 좀더 시켜야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의도된 '과장된 연기'에도 결코 슬쩍 묻어넘길 수 없었던 꽃미남 3인방의 어색한 연기는 참으로 봐주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도 예전이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록키호러..'와 '크라이베이비'를 억지로 떠올리면서, 이 어색함과 민망스러움은 외국어와 모국어의 차이인가 낯선 문화와 친숙한 문화의 차이인가를 숙고해 봤지만.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컬트키치삐급을 표방한 영화라도 (안했을지도모르겠다만;;),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한 관객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의 조악스러움을 대령하는 센스를 겸비해야하지 않을까. 암튼, '다세포소녀' 덕에 오랫동안 들춰보지 않았던 영화 관련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장영규야 원래 그렇다치고(?), 이재용의 속내가 새삼 궁금해졌다. 내가 너무 단세포인 걸까.



2006-08-14 02:27,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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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