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지인이 떠난 후, 9시가 되기 전에 일어나 김창완 아저씨의 라디오 오프닝으로 하루를 여는 아침 루틴을 되찾았다. 인천 지인은 이틀 동안, 아침에 일어나 9시가 되기까지 책장에 있는 무민 동화책을 읽었다고 했다. 새해여선지, 고심하던 오프닝 멘트가 결국 '김밥 먹었습니다'여서 민망했는지 김창완 아저씨는 청취자 사연을 읽으며 아주 실감난 목소리 연기를 하셨는데 방에서 그걸 들은 지인이 엄청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혼자 있으면서도 크게 웃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난 그런 편이 아니어서 신기했다. 그런 건 타고나는 게 아닐까 싶다.
오후 3시경 버스를 예매한 인천 지인과 통영리스타트플랫폼과 당산나무를 돌아보고 해저터널을 지나 윤이상기념관으로 갔다. 이전에는 닫혀 있어서 궁금했던 음악상자 부스가 열려 있었고 덕분에 신기한 오르골 체험, 기념관도 잠시 돌아보고 '베를린하우스'는 개관시간이 아니어서 패스. 몇 년 전 운 좋게 2층 베를린 서재 구경하며 설명도 들었었는데, 지인에게는 기약이 없어 아쉬웠다. 점심은 서피랑국숫집에서 먹기로 했는데 휴무일이어서 동피랑 아래로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우연히 알게 되어 지인이 올 때 몇 번 갔던 곳인데, 샐러드가 없어져서 아쉬웠지만 마지막 식사로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남은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았지만 커피 좋아하는 사람이라 테이크아웃하기로 하고 삼문당에 갔는데, 평일 낮시간임에도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놀랍고 반가웠다(?). 좀 기다려야 했지만 문외한으로서 '산미'가 있는 커피를 부탁드리고 받은 이름 모를 커피가 정말 맛있었다. 별 기대 없는 듯 보였던 지인이 공간도 커피도 매우 좋아하여 괜히 뿌듯.
인천 지인은 삼문당 앞에서 택시 타고 터미널로 떠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강구안 쪽으로 걸었는데, 지인들과 복작거리며 지날 때는 모르고 지나쳤던 성심의원 폐업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진료 받으러 가본 적은 없지만 건물의 골목쪽 벽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 판넬이 걸려 있어 살짝 고맙게 여기는 곳이다. 강구안 도로 공사 하면서 반대 편의 오복미역국 건물인가에 붙어 있던 같은 시 판넬은 일찌감치 사라졌기 때문에 더 애틋하기도 했다. 이제 도로 확장 공사는 마무리됐고, 철거를 할 정도의 건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의원은 문을 닫아도 건물과 시는 그대로 잘 남아 있을까? 강구안이 너무 번듯해지는 걸 바라지는 않지만 곳곳에 주인 잃은 빈 가게들이 오래 보이는 건 마음이 쓰이는데, 생각도 못했던 폐업 현수막을 보니 사정은 모르지만 아쉽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지인들에게 마치 내게 다짐하듯 망설이고 주춤하던 계획에 대해 말했다. 아무리 굳은 마음이라도 누구도 모른 채라면 발화되었을 때만큼의 무게를 갖지 못하는 것 같고, 꼭 하고 싶은 일을 해내려면 서동요 작전이 꽤 유효하다는 경험을 믿어보기로 했다. 광주 지인이 도착한 저녁 이야기를 나누다 말이 나왔는데, 덕분에 길을 지나가다 부동산이 보이면 가게 자리 있나 보자며 유리창을 유심히 살펴주는 게 내심 감동적이기도 했다. 새해의 첫날부터 무려 나흘을 타인과 함께 보냈는데, 평소 혼자여서만이 아니라 그들이었기 때문에 고맙고 좋은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4박 5일만에 혼자가 되니 그 역시 좋았는데, 함께 나눈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오래 품었던 계획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잔뜩 늘어졌던 긴 시간들에 나름의 이유를 붙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번 설에 엄마아빠에게도 이야기를 하고, 봄이 오면 주저하지 말고 움직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