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1. 9. 22:09



광주 지인은 다음 날 출근 때문에 일요일 오후 1시 20분 광주행 버스를 타야 했다. 워낙 아침형이라 우리까지 덩달아 일찍 일어나 굴떡국을 끓여먹고 함께 집을 나섰다. 미수해안로를 따라 해양관광공원까지 산책을 하고 충무교를 건너 착량묘까지 걸었다. 착량묘는 이순신 장군 사망 1년 후인 1599년에 종군했던 수군들과 주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초가 사당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초가가 아니지만, 이후에 조성된 수많은 관제 기념물들을 생각하면 아주 소박한 규모와 구성이다. 긴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렵고 힘들었을 텐데 민초들이 지은 사당이라니, 어딜 가나 흔해서 무감했던 이순신 장군은 정말 히어로였나보구나, 400년이 넘도록 그 뜻이 이어진 진짜 추모지 같아 처음 안내문을 읽었을 때 애틋한 마음이 되었었다. 두 사람 다 통영을 이전에 몇 차례 다녀갔었는데 착량묘는 처음 들어봤고 알게 되었다며 관심을 보였다.

몇 달 전 교통사고를 겪은 광주 지인에게 차를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덕분에 1월 1일부터 3만 보를 훌쩍 넘게 걸었다. 대부분의 여행을 뚜벅이로 하기 때문에 나는 내 발로 걸어야 여행 같고 그곳에 다녀온 것 같다고 느끼는 편인데,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걷는 걸 좋아하고 통영을 뚜벅이로 여행하는 건 처음이라며 좋아했다. 전날과 달리 해안에 새들이 거의 없었다. 평소 미수해안로를 걸을 때면 갈매기나 왜가리가 늘 있었고 가로등마다 한 자리씩 차지한 갈매기들이 귀여워 사진도 찍곤 했는데, 새 보기를 좋아하는 지인들과 함께하는 길에 자취를 찾을 수 없는 게 좀 아쉬웠다. 그래도 해안도로 가까이 바다에 물고기들이 적지 않아 구경하며 여유롭게 걸었고, 외향지수가 엄청난 지인들은 낚시하는 이들의 바구니도 기웃대며 간단한 말을 주고 받았다.

원하지 않은 퇴직을 하게 된 인천 지인에게 꼭 맛있는 밥을 사주고 싶었던 광주 지인의 바람을 존중해 함께 터미널로 갔고, 아직 꺼지지 않은 배로 점심을 먹어야 했기에 그나마 가볍게 느껴지는 스시를 택했다. 간판을 발견하고 별 생각없이 들어갔는데 런치세트가 깔끔하고 적당했고, 양을 가늠하지 못하고 모듬튀김도 주문하려는 우리에게 드셔보고 시키라며 말려주는 직원의 조언도 멋졌다. 디저트로 내주신 요거트 아이스크림으로 산뜻하게 식사를 마무리하고 해변을 잠시 걸었다.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해변 가까이에 물고기가 적지 않았고, 자유의 여신상이 뜬금없이 당당한 요트교실 근처에는 엄청나게 많은 물고기들이 마치 밧줄 똬리들이 가라앉은 것처럼 떼를 이루고 있었다. 매일 산책하며 관찰하던 주민이 며칠 사이 알에서 깨어난 물고기들이 머물러 있다며 알려주셨는데, 나도 신기하고 놀라웠지만 광주 지인 가시는 길에 큰 선물이 된 것 같아 기뻤다.

광주 지인이 떠난 후 인천 지인과 RCE세자트라숲을 산책하고 이순신공원까지 트레킹 코스를 걸어보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렸는데 역시나 기약이 없다. 둘 다 걷는 걸 좋아해서 지도앱을 검색하니 3시간이면 도착 가능한 거리, 다시 해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많은 여행을 혼자 다녔고 좋아하지만,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마음을 접은 길들도 적지 않은데 낯선 길을 흔쾌히 함께 걸을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시간이었다. 해변도로를 끝까지 걸으니 얼마 전 현수막으로 개관 소식을 접했던 청소년체육센터가 나왔다. 예전 여행 때 가봤던 도서관을 지나 마을길로 접어드니 차를 타고도 지나본 적 없는 길이 나왔다. 기호마을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이 갈림길이었는데, 지도앱을 정확히 읽어내기 어려웠지만 저 건너 차도 끝 좁다란 공간에 그어진 하얀 선 하나를 인도라고 믿고 걷기엔 위험해 보였다.

선택한 인도는 인적도 차량도 드문 길, 날씨도 좋고 호젓한 시골 마을은 평화로웠다. 중간에 좁은 뻘도 나오고 멀리 우리가 걸어 돌아온 터미널 근처 해안이 보이고, 오래 방치된 듯한 작은 폐교도 지났다.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오른쪽 발뒤꿈치가 가벼워졌고 이상해서 살펴보니 신발의 통굽 뒷부분이 사라졌다. 돌아보니까 십여 미터 뒤에 덩그라니 떨어져나간 통굽이 놓여 있다. 산 지 십년도 넘은 신발을 그냥 버리기 아까워 이번에 신고 버리든지 하려고 꺼내 신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단에 한참을 웃었다. 잠시 멈춘 김에 지도앱을 다시 살펴보니 우리가 걷는 방향은 기호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잘못 선택한 것이었다. 인천 지인은 이 상태로 걸으면 허리 아파 안 된다며 콜택시라도 부르자 했지만, 기분 탓인지 나는 그냥 웃겼고 결국 길을 거슬러 다시 걸었다. 지나는 택시도 없어서 도서관을 지나 죽림의 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일단 집으로 가기로 했다. 예전에 책방에 가느라 지났던 기억이 나서 얼마 후 도착한 버스를 탔는데, 다음 정류장이 통영 경찰서였다. 결국 3시간 만에 다시 터미널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뭔가 마법에 걸린 느낌이었다.

다행히 RCE세자트라숲에서 이순신공원까지의 트레킹은 온전히 나의 욕망이었기 때문에 인천 지인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며 이상한 산책으로 날린 오후를 별로 아까워하지 않았다. 겨울 해는 짧고, 집에 도착하자 곧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전날 인천에서 내려온 지인도 새벽부터 일어나 종일 에너지를 쓴 나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집에서 쉬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며 한참 수다를 떨었다. 낯은 엄청 가리지만 친하거나 편한 사람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나이를 먹으며,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상대를 살피지 않고 내 기분에 취해 내 말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생각하는데 가끔 놓친다. 대화가 통한다고 느끼면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는 건 당연하지만, 내 위주로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들이 상대에게 모두 잘 다가갈 리도 달가울 리도 없을 것이다. 좋은 시간이었지만 꺼내지 않았으면 나았을 이야기까지 꺼내는 바람에 애매한 순간이 있었다. 얼마 전에 읽고 마음 한편에 어지러운 자국을 남긴 [짐을 끄는 짐승들]에 관한 것이었는데,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아무렇게나 꺼내면 안 된다는 걸 실감했다.

아무튼 두 사람 덕분에 새해가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시작됐다. 원해서 좋아서 왔지만 모두에게 마음을 닫고 잔뜩 웅크린 채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1년 넘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실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다정하고 유쾌한 이들과의 짧은 여행이 새삼 지금의 내 모습을 비춰보게 만들어줬다. 아무것도 어렵지 않은 사람은 없고,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것으로 내 중심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어떤 모습이 원래의 모습이고 그 원래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멀리서 온 귀인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바닥에 찐득하게 눌러 붙었던 마음이 살짝 기지개를 켜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1월 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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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