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2. 1. 5. 21:19

 

 

멀리 광주와 인천에서 온 지인들 덕분에 전에 없이 활기차게 새해를 시작했다. 12월 중하순부터 해넘이 해맞이 어쩌고 하지 말라는 안전문자가 날아왔지만, 수년 전 1월 1일 동네 뒷산에서 일출을 보고 내려오다 넘어져 두어 달 병원 신세를 졌음에도 의연히 세레머니를 이어가는 새해일출마니아께서 31일 저녁에 도착하셨다. 이것저것 의미 부여가 많은 편이지만 게으른 탓에 염두에도 없었던 새해 일출, 하지만 그에 진심인 손님 대접을 하지 않을 수 없어 새벽같이 일어나 7시 전에 집을 나서는 놀라운 경험을 해버렸다. 다녀와 떡국 끓일 준비도 미리 해두었지만 일출 보고 산책하다 발견한 식당에 반색하는 지인 덕분에 난생처음 물메기탕을, 평소에 먹지 않는 아침으로 먹었다. 미각이 둔하고 식도락에 취미가 없고 향토음식에 문외한이므로, 달리 덧붙일 말은 없다.

광주 지인은 나와 15살 차이가 난다. 연락하며 지내는 몇 안 되는 지인 중 가장 적극적이고 외향적이고 활달하신 분으로, 3년 정도 이어졌지만 주 1회 두어 시간씩 수업을 함께 들은 인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몇 년 전 한 달은 우리집에서 살기도 했었는데 새벽에 출근하고 밤 10시가 되기 전에 잠드는 패턴의 영향도 컸겠지만, 신기할 만큼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까탈스럽고 예민한 성격을 가진 나로서는, 전적으로 그의 긍정적이고 너그럽고 원만한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오랜 일터에서 퇴직하고 광주로 내려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공공부문에서 일종의 돌봄노동을 시작했다. 늘 밝고 에너지 넘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밀함이 태도의 기본값인 그가, 얼마 되지 않는 지인 중 하나라는 건 사실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일출과 긴 산책 후 집으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산책에 나섰다. 광주 지인에게는 높이 뜬 태양이 만드는 윤슬도, 해변에서 미동 없는 왜가리 한 마리도, 가게 앞에 가득한 이끼 화분들도, 1월인데도 호스로 물을 줄 수 있는 통영의 날씨도, 그러니까 산책하며 눈에 닿는 거의 모든 것들이 경이와 웃음의 대상이었다. "저것 봐라, 저것 봐라."하며 산책하는 내내 놀라고 웃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감탄하는 모습이 새삼 신기하면서도 내게까지 그 밝은 에너지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오전에 버스를 탄 인천 지인을 네 시쯤 중앙시장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기 때문에 산책은 여유로웠고 조금 배가 고팠다. 강구안의 꽈배기를 떠올리고 찾아갔지만 문을 닫았고, 아쉬운 마음에 지나쳐온 길을 되짚어 작은 분식집에 들어갔다. 1월 1일임에도 문을 연 가게에서 떡볶이와 꽈배기와 튀김을 먹으며, 여든이 다 됐다는 사장님과 꽤 길게 대화를 나눴다. 

인천 지인을 만나 서피랑에 갔다. 나도 꽤 오랜만이었는데, 몇 달 전 포크레인들이 작업하던 곳은 집을 다 허물고 정비가 되어 있었다. 미개통 상태였지만 강구안과 남망산을 잇는 다리가 놓인 것도 처음 봤는데, 불과 1년 남짓 살았음에도 도시가 변해가는 모습이 꽤 선명해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박경리 선생 생가와 '돌아와요 충무항에' 노래비, 서포루, 이중섭 작가의 조형물 등을 돌아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인천 지인이 [판소리 복서]를 봤다고 해서 무척 반가웠다. 인천 지인은 한참 전 부천에 살 때 일로 얼핏 아는 사이였다가, 광주 지인을 만난 수업에서 다시 만났다. 활동하며 이래저래 만나면 격의없이 편한 사이였지만 몇 년간 소식도 몰랐는데 광주 지인 덕에 새해를 함께 보내게 됐다. 마침 12월 31일로 4년 넘게 하던 일을 마치게 된 터라 화요일까지 함께하며 즐거웠고, 그 역시 새해의 평일 첫 주를 집에서 맞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말해줘서 다행이었다.

저녁에는 중앙시장에서 가리비와 굴, 회를 사와서 먹었다. 통영으로 이주하고 얼마 안 됐을 때 광주 지인이 전화해서 잘 챙겨먹고 있냐며 가리비를 사서 삶아 먹으라고 했던 게 떠올라 처음 시도해봤는데, 생각보다 간단했다. 얼마 전에 읽은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건네받은 소화 불량의 문제의식들이 여전히 남아는 있어서 뇌리 한 구석에 맴돌기는 했지만 차마 입에 올릴 수는 없었으므로 일단 무시했다. 아무려나, 짧게 잡아도 오륙년 만에 함께 만나 나누는 수다는 즐거웠다. 나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과 성찰과 태도라고 생각하면서도 언젠가부터 젊었을 때는 전혀 염두에 없었던 나보다 십수 년, 수 년의 나이를 먼저 살아가는 여성들의 일상과 생각에 마음이 기울고는 하는데, 역시나 제 속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중심을 잡으며 사는 게 정답인 것 같다. "어리니까", "아직 젊으니까"와 같은 생경한 전제가 붙은 말을 이따금 듣는 즐거움도 오랜만에 덤으로 누리며 즐겼다. 여기까지가 1월 1일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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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