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1. 16. 13:5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올레타는 증조 할머니와 산다. 화려하지만 천박한 차림으로 가끔 집에 들르는 엄마 한나는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진작가다. 분주하고 산만하게 잠시 머무는 중에도 할머니와의 언쟁을 잊지 않고, 와중에 문밖에는 낯선 남자가 기다린다.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그리울 테지만 비올레타에게는 그런 생활이 익숙해보인다.

어느 날 한나는 비올레타를 데리고 잠겨 있던 위층의 창고로 올라간다. 오래 방치된 듯한 공간에는 평범한 일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의상들과 소품들이 가득하다. 소녀보다는 어린이에 가까운 나이지만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비올레타는 한나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피사체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이 소중한 비올레타는 한나가 요구하는 대로 여러 포즈를 취하며 모델이 되어준다.

 

한나는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사진작가로서의 입지 다지기에 열심이다. 낡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에른스트는 동료이자 거래처이자 애인, 비올레타의 사진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예감한 한나는 들뜬 마음으로 에른스트에게 딸을 데리고 가기도 한다.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한나는 에른스트를 비롯해 여러 예술가들과의 친분 쌓기에 열중하며, 비올레타의 사진들을 선보인다. 앳된 얼굴로 도도하고 시크한 표정을 연출하는 비올레타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진에 대한 반응에 고무된 한나의 요구는 점점 도를 넘어선다.

 

미성년자인 비올레타에게, 엄마의 요구가 어떻게 이해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엄마와의 작업을 거듭하며 평소 옷차림은 또래 아이들과 확연히 달라지고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비올레타는 백안시되기 시작한다. 엄마의 북돋움과 세뇌에 자신의 끼를 발산하면서 남들보다 튀는 개성과 존재감에 비올레타도 조금씩 경도된다. 하지만 한나가 연출하는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이미지를 표현해내는 특출난 외모와 재능을 가졌을지언정, 비올레타는 고작 열 살 즈음의 어린 아이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이 취하는 포즈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을 리 없고, 자신의 욕구를 예술로 포장한 채 돈과 유명세에만 매달리는 엄마의 집요함을 거부하지도 못하는 비올레타는 그대로 한나의 제물이 된다.

 

아동 학대의 결과인 사진에 예술성을 부여하며 주목하는 사회의 상업성도, 그에 편승해 선을 넘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 한나도 비올레타의 세계를 갉아먹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 유명 뮤지션과 협업하게 된 한나는 비올레타를 데리고 출장 촬영을 나가 성폭력의 가능성이 농후한 현장에 밀어넣기까지 한다. 과정은 매우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비올레타를 향한 한나의 반응은 위협에 가깝다. 이후에도 모녀의 갈등은 지속된다. 더 이상 촬영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비올레타의 의지는 무시되고, 사진이 알려지며 법원의 조사가 이어지지만 한나는 거침이 없다.

 

비올레타는 조사관과 만난 자리에서 엄마가 더 이상 자신의 사진을 쓸 수 없도록 해달라고 강력히 요청한다. 하지만 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한나에게는, 딸을 모델로 한 아동 포르노에 가까운 사진 작업의 정당성 역시 확고하다. 한나의 분열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비올레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의 사진이 표지에 실린 새로운 잡지의 포스터를 마주하고 찢어버리는 비올레타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대략의 내용을 알고 영화를 봤는데도 생각보다 큰 감정 노동이 필요했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순화되고 현재적으로 화해에 이른 상태일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짐작했었던 것 같다. 딸에 대한 사랑과 부적절한 '예술적 대상화'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사실상 범죄 행각인 한나의 작업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비올레타를 연기한 배우가 걱정스럽기도 했는데, 찾아보니 성인이 된 후에도 배우로 활동하고 있어서 괜히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공감하기 어려울 법한 이야기였지만 [해탄적일천]과 [프랑스]를 이어 보고 다소 진이 빠진 상태여서 마음이 더 녹초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실제 감독의 엄마인 이리나 이오네스코는 에바 이오네스코가 어릴 때부터 10년간 찍은 누드 작품 '거울의 신전'이 대표작으로 알려진 사진작가라고 한다. 선정성과 퇴폐성이 농후한 데다 어린 딸을 모델로 했다는 점 등이 당대에도 논란이 되었던 모양인데, 에바가 11살에 찍은 사진은 "플레이보이" 역사상 최연소 누드 사진으로 기록되었다고 하니 예술이니 뭐니 하는 포장의 위선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과거가 된 후일담에 따르면 에바 이오네스코는 십대 초반 영화 배우로 데뷔한 후 위탁가정에서 성장했고, 이리나는 친권을 잃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에바를 모델로 한 그의 작품들이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의 인권 기준으로 과거의 모든 일을 재단할 수는 없겠지만, 감독의 사례는 과거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연하다. 영화 제작 직후 감독은 이리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이를 일부 인정해 소액의 배상 판결을 내렸지만 어린 시절 누드 사진으로 이리나가 얻는 수익에 대해서는 제재를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법의 판단 여부를 떠나 수십 년이 지나도 오롯한 누군가의 상처를, 지난 세기의 예술로 인정하고 전시하는 행태가 의아하다. 후일담을 모르고 영화를 본 직후에는 뒷맛이 씁쓸하면서도, 감독에게 영화가 어떤 치유의 과정이 되었을까 생각했는데 불가항력의 과거에 대한 고발이자 저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13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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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