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1. 16. 12:37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멀리 드문한 사람들의 실루엣과 해 질 녘 해변의 풍경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된다. 이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DJ의 멘트, 3년만에 귀향한 피아니스트 탄웨이칭의 연주회 소식을 듣고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린자리가 보인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지만 탄웨이칭은 연주회를 마친 후 바로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피아노 조율 상태 체크와 기자간담회 등으로 빠듯한 일정, 생각에 잠긴 듯한 탄웨이칭의 표정은 밝지 않다. 호텔로 전달된 메모에 잠시 갈등하던 탄웨이칭은 기자간담회를 취소하고 린자리를 만나러 간다.

린자리는 탄웨이칭의 연인이었던 자썬의 동생, 둘은 친밀하게 우정을 나눴던 사이다. 세 사람은 자주 만나 시간을 보냈고 함께 방문한 고향집에서 더욱 가까워졌다. 고향집은 정갈하고 흐트러짐 없는 공간, 처마에 매달린 새장 속 새들도 소리없이 고요하다. 시골 마을 의사인 아버지는 엄격하게 자식을 통제하는 보수적인 가부장이고 어머니의 존재감은 깔끔하게 정돈된 살림에서만 드러나는 것 같다. 도시에서 럭비를 즐기는 활기찬 청년이었던 자썬은 엄한 아버지 앞에서는 경직된 의대생이 된다. 거스를 수 없는 권위로 압도하는 아버지는 정략 결혼을 밀어붙이고, 자썬은 이를 받아들인다.

린자리는 자썬과 헤어진 탄웨이칭의 집을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한 채 편지만을 전하고 돌아온다. 아무 연락 없이 유학을 떠났던 탄웨이칭은 피아니스트가 되어 돌아왔고 둘은 13년만에 마주앉았다.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환하게 웃던 탄웨이칭도, 조금 숙맥 같지만 귀엽고 해사하던 린자리도 세련된 삼십 대 여성이 되었다. 영화는 마주앉은 두 사람의 대화와 과거를 오가며, "이렇게 말할게"라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는 린자리의 지난날을 상세히 전한다.

대학생이 된 린자리는 활달하고 이성 교제에 적극적인 절친 신신을 통해 더웨이를 만났다. 더웨이는 신신의 남자친구 아차이와 오랜 친구로, 반듯하지만 소심하고 얌전해보인다. 호감을 나누던 더웨이와 교제하며 졸업이 다가오고 아버지는 다시 정략 결혼을 준비한다. 받아들일 수 없었던 린자리는 고향집에서 야반도주해 더웨이에게 간다. 가진 것 없이 결혼한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은 짧았다. 아차이의 사업에 함께하며 생활은 윤택해졌지만 밀려드는 일과 접대에 치이면서 더웨이는 변해간다. 더웨이만 바라보는 린자리에게 다정한 대화가 사라지고 결혼기념일 식사 약속이 어긋나는 일상은 외롭고 서럽다. 나름 노력했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불신과 오해는 커져가고, 가정도 일도 버겁게 느껴지는 더웨이의 권태와 불만도 쌓여간다.

어느 날 장을 보던 중 린자리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신신과 우연히 마주친다. 아차이와는 일찌감치 헤어지고 함께 수업을 들었던 강사와도 잠시 사겼던 신신은 이후 만난 사업가와 낳은 아이를 키우며 어머니와 살고 있다. 화려한 연애를 즐기던 시절은 가고 생계와 양육의 무거운 짐을 감당하고 있는 신신, 하지만 어느새 한참 연하의 사진가와 교제하며 린자리에게도 의도치 않게 새로운 만남을 선사한다. 신신이 일하는 스튜디오의 휴게실에서 잠시 마주하게 된 청년은 세계를 여행하며 책을 내는 낭만적인 방랑자, 여전히 외롭고 바쁜 더웨이 덕에 자유로운 린자리는 잠시 그에게 흔들리지만 마음의 선 앞에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외박한다는 더웨이의 현장에 린자리가 찾아간 일로 두 사람은 더욱 멀어졌다. 즈음 사업을 돕겠다며 사무실을 드나들던 류샤오후이가 던지는 추파를 무시하던 더웨이의 마음도 달라진다. 공허하고 무의미한 결혼 생활을 견디기 위해 린자리는 꽃꽂이며 쇼핑이며 전에 없던 화려한 헤어스타일까지 시도하며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꽃꽂이 클래스에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할 만큼 스트레스와 신경 쇠약이 극도로 달한 린자리는, 그래도 병실에 찾아온 더웨이를 고맙게 여긴다. 하지만 둘 사이에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신신과의 수다로 밤을 새운 후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온 3년 전 어느 아침, 린자리는 더웨이의 실종 소식을 접한다. 실종 장소로 찾아간 린자리는 멍하고 아연하다. 마을 사람들은 바닷가에 한참 앉아 있던 낯선 도시 남자를 목격했고, 파도에 휩쓸려온 약병에는 더웨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신을 수색하며 조사를 진행하는 경찰은, 남편을 본 지 며칠이 지났고 그가 병원에 다니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린자리를 의아해한다. 린자리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아차이는 샤오후이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더웨이의 횡령 의혹과 잠적 가능성을 거론한다. 아차이가 떠난 후 멀리 시신을 수색하던 배가 해변으로 다가온다. 린자리는 시신을 확인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

주체적인 삶을 위한 선택이 언제나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온 린자리는 홀로 남겨졌다. 언제나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던 어머니는 야반도주하는 린자리의 기척을 알아챘지만 모른 체했고, 혼란한 심정의 린자리에게 조용히 미소를 보낼 뿐이다. 린자리의 기억 속 아버지는 근엄하게 모두에게 군림하면서 간호사를 성추행했고, 아마도 임신한 간호사를 단속하며 떠나보내는 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새장의 지배자처럼 가족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남은 가족들의 삶은 각자의 몫이다. 어느 날 류샤오후이가 찾아와 더웨이가 보낸 수신자가 바뀐 편지를 내민다. 린자리와도 샤오후이와도 행복할 수 없었던 더웨이가 선택한 진실은 짐작할 수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나눈 린자리와 탄웨이칭이 호텔 커피숍에서 나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것은 자썬의 안부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했고 병원을 이어받아 의사로 일했다. 빛나는 청춘의 시간이 무색하게 무표정한 얼굴이 되었지만, 가지 않은 길에 덤덤해보였고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던 길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운명이듯 살아가던 자썬은 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 탄웨이칭이 린자리를 만나기로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었을 자썬의 죽음은 예기치 못한 것이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으므로 그저 사실이 된다. 13년간의 길고 긴 이야기를 유장하게 풀어헤치고 뒤돌아가는 린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탄웨이칭의 시선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는 [타이페이 스토리]를 보았을 뿐인데, 과문한 탓이겠지만 소개에 따라붙는 찬사와 호평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었다. 1983년 개봉한 데뷔작이라는 이 영화에서도 기대만큼의 큰 울림을 느끼지는 못했다. 남매와 그의 연인들을 축으로 십여 년의 세월을 따라가는 영화에는 40년 전 대만 사회의 풍경이 잘 반영되어 있고, 그 모습은 급속한 경제 발전과 도시화를 경험한 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공유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가부장적 전통과 현대적 변화가 혼재하는 가운데 시골과 도시의 문화적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다른 시공간에서 살아가는 부모와 자식 세대가 겪는 갈등과 모순은 증폭된다.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향한 욕망은 강렬하지만 그를 이루기 위한 물리적 심리적 기반은 허약하고, 그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청춘은 기성 세대가 된다.

영화 속 누구도 행복해보이지 않고 꿈을 위한 용기의 결과는 공허하지만, 어쩌면 누구의 인생이나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언제나 행복한 인간이 존재할 리 없고 꿈은 꿈일 때만 완전할 수 있으니까. 적지 않은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결과로서의 현재가 아니라 그렇게 흘러온 과정과 의미라고 느꼈다. 더웨이의 증발 이후 린자리의 삶은 생략되었지만 오빠와는 다른 선택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들보다 그로 인한 성장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과거보다는 단단해보이는 그의 모습에 어떤 믿음을 실어주고자 하는 것 같았다.

4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의 입장에서 인물과 사건의 전형성이나 너무 설명적인 전개에 지루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13년만에 귀향해 연주회를 앞둔 피아니스트에게 이렇게 폭격하듯 지난날을 다 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 탄웨이칭이 마음의 동요 없이 연주회를 잘할 수 있을까 오지랖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더웨이도 나쁜 놈이지만 린자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아 말리고 싶기도 했고, 린자리의 말과 함께 과거 장면이 오버랩되는 경우가 많아서 후반부에는 나도 모르게 대사로만 끝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놀랍게도 양조위와 나훈아를 상하로 반반 섞은 얼굴인 아차이가 등장할 때는 그나마 기계적 활기가 느껴졌지만, 마지막 류사오후이와의 사무실 장면까지 굳이 재현되어야 했을까 싶기는 했다.

 

어쩌면 전날 세 편의 영화를 본 후여서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지만, 흐른 세월을 감안해도 나에게 매력적인 영화는 아니었던 것 같다. 감독과 작품에 따라붙는 찬사에 공감할 수 없는 마음이 아쉽기는 한데, 후에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나 [하나 그리고 둘]을 극장에서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할 것 같다. 관객은 가장 뒷줄에 앉은 나 포함 네 명이었고, 몇 줄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이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무릎담요를 단정히 접어 챙기는 아저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계단을 내려갈 때 여성분이 뒤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며 말을 건넸다. "네" 하며 웃고 말았는데, '우리가 이 영화를 함께 보았군요' 라는 흐릿한 연대감이 발화된 순간인 것 같아서 약간 다정한 마음이 되었다. 


1/13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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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