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자매는 너무나 다르지만 참 닮았다. 매사에 미안해하고 누구에게나 쩔쩔매는 희숙, 매사에 가식적이고 타인에게 완벽하게 보여야 하는 미연, 매사에 또라이 같고 자기중심적인 미옥,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그 극단성만큼은 꼭 닮았다.
미옥은 극작가다. 노랗게 물들인 흐트러진 머리에 히피 같은 옷차림으로 담배와 술, 과자를 끼고 산다. 잔뜩 어지러진 어두컴컴한 집에서 글을 쓰고 전화를 한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 시비를 걸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심심치 않다. 과일도매업을 하는 착한 남편은 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와서 미옥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를 돌본다.
미연은 성가대 지휘자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신도시의 큰 아파트로 얼마 전 이사를 했고, 기도와 "주여"를 달고 산다. 남 보기엔 아무 걱정 없어 보이지만 깔끔히 정돈된 집안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술에 취해 매일이다시피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는이야기를 늘어놓는 미옥의 전화를 받아내는 일도 버겁다.
희숙은 꽃집을 한다. 허름한 상가 건물에 세든 가게는 꽃집이라기보단 어둡고 작고 길쭉한 창고처럼 보인다. 전철이 가까이 지나는 낡은 집도 어둡고 비좁기는 마찬가지, 날나리 딸 보미는 엄마를 대놓고 무시하고 아내를 무시하며 돈만 요구하는 남편은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 의지할 데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녀는 항상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잘못한 것도 없이 누구에게나 미안하다고, 죄송하다고 말한다. 말간 얼굴에 주눅든 웃음으로 상처를 감추며 살아가는 희숙은 자주 자해를 한다. 그렇게 버티며 살아왔고 병을 얻었다. 얼마 전 암 진단을 받았다.
술 취한 미옥은 미연에게 무시로 전화해 지난 이야기를 꺼낸다. 대학교 1학년 때 함께 갔던 강릉 바닷가의 허름한 식당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바쁜 미연이 성의 있게 응하지 않으면 "나는 쓰레기"라며 자조하고, 대여섯 살쯤 겨울 밤에 맨발로 함께 수퍼까지 왜 뛰어갔었는지를 궁금해한다. 미연은 교회 사람들에게 하듯, 술 취한 미옥에게도 자상하고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쓴다. 거의 돌 것 같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식당 이름을 기억해보겠다고, 너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답하며 전화기 너머의 동생을 감싸고 보살핀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설계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미연의 몸부림은 우스꽝스럽고 징그럽다. 그럭저럭 장단을 맞춰주던 남편은 점점 멀어지다 성가대 솔로를 맡은 효정과 바람이 났다.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현장도 목격한 미연은 괴롭다. 스스로를 위해서도 숨겨야만 하는 감정은, 여느 날처럼 식사기도를 하지 못하는 어린 딸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것으로 엉뚱하게 튄다.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효정을 응징하고 표정을 관리하며 남편을 대하는 미연, 그 가식과 허위에 질린 남편은 적반하장으로 폭발하고 급기야 욕설과 손찌검을 날린다. 타인을 의식하듯 자신에게도 단정하게, 금세 평정심을 되찾는 미연은 위태해보인다.
자신이 암이라는 걸 알게 된 희숙 역시 위태롭고 괴롭다. 다른 가족에게는 알릴 생각도 못하고, 딸이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인디뮤지션의 공연장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보미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애먼 호소를 한다. 엄마의 뻘짓을 알고 지긋지긋한 집구석 나가겠다는 보미를 막기 위해 희숙은 그제서야 자신이 암이라고 털어놓는다. "니는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제?" "엄마 무섭다" 희숙은 너무 쓸쓸해보인다.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아들 성운의 학부모 면담에 술 취해 찾아간 미옥은 담임과 성운의 친엄마 앞에서 추태만 보이고 돌아온다. 미옥의 전화번호를 '돌+아이'라고 저장해놓은 사실을 알고 성운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는 남편에게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미옥, 그러고 보니 그녀는 성운에게는 폭력적이지 않았다. 한바탕 가족간 전쟁을 벌인 후 미옥은 처음으로 말도 안 되는 밥상을 차린다. 실은 엄마 노릇 같은 걸 잘해보고 싶었지만 배운 적이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미옥, 돌변이 당혹스럽지만 남편과 성운의 표정은 나쁘지만은 않다.
인물도 그들이 놓이고 만드는 상황도 극단적이다. 영화를 보며 세자매가 어떻게 모두 저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는데, 한편 오래 혼자 살아온 나는 주변 사람들의 생활을 깊숙하게 들여다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지 싶기도 했다. 미옥의 잦은 전화를 곧잘 받아주는 미연은 그에 억지로 결속되어 있지만, 세자매는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 살아간다. 특히나 희숙은 더욱 고립된 느낌으로 거의 언제나 어두운 공간에 혼자,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오히려 안절부절이다. 그런 희숙이 미연과 마주 앉은 중국음식점에서만은 조금 덜 불안해보였는데, 이십 년도 더 전이지만 함께 [타이타닉]을 보고 첫 월급을 받은 희숙이 미연에게 맛있는 걸 사준 적 있다는 사실이 뭔가 안심이 될 지경이었다.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세자매가 고향집에 모인다.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고향집, 그곳에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픈 막내 진섭이 부모님께 얹혀살고 있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 다정한 안부나 애틋함 같은 건 없다. 교회 장로들의 모임에 간 아버지는 집에 없고, 2세들은 각자 휴대폰에 열중하고 있다. 일찍 도착한 미옥은 벌써 진섭과 한바탕하고 문을 닫아건 진섭의 방 문고리를 잡고 난리를 치는 중이다.
고향 가는 길, 미옥의 두서없는 통화에서 언급되었던 어릴 적 기억의 편린들로 세자매가 함께 겪었던 비밀이 밝혀진다. 미연과 미옥이 겨울 밤 맨발로 수퍼까지 뛰어가야 했던 건, 아버지의 폭력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고 엄마를 때리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배다른 자식인 희숙과 진섭을 때리기 시작했다. 희숙과 진섭을 때리는 아버지를 피해 몰래 뛰쳐나온 미연과 미옥은, 수퍼의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경찰에 신고하려 했지만 쥐어주는 쭈쭈바를 받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버지의 폭력을 알고 있던 이웃들은 혀를 찰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미연에게 오히려 아버지 수갑 차고 끌려가는 걸 보고 싶냐며 가서 함께 잘못했다고 빌라고 할 뿐이었다. 돌아온 집 앞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진섭을 부둥켜안은 어린 희숙이 주저앉아 있었다.
그렇게 성장한 세자매와 진섭은 각자의 트라우마를 끌어안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 그 지옥을 직접 겪고 목도한 경험은 누구도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오늘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희숙은 모든 걸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그마저도 임계점에 도달하면 자해하는 것으로, 미연은 점철된 가식으로 속세와 구원의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악착 같은 생활력으로, 미옥은 늘 술에 취해 아이를 제외한 누구에게나 쉽게 폭력성을 내보이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딘가 아파 집구석에만 처박혀 있던 진섭은, 오늘 그 존재감을 활짝 발휘할 예정이다.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식사, 가족들과 교회의 담임목사까지 제법 근사한 식당의 홀을 빌려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려는 찰라 뒤늦게 나타난 진섭이 아버지에게 뚜벅뚜벅 걸어간다. 욕설과 함께 아버지에게 오줌을 갈기고, 식당은 아수라장이 된다. 진섭을 말리는 육탄전 사이로 자매들의 절규가 튀어나오고 미연은 정색을 하고 아버지에게 요구한다. "우리들한테 사과하세요!" 와중에도 엄마는 아버지 이제 안 그런다며 편을 들고, 당황한 아버지는 상황을 회피하려 든다. 난장판을 지켜보던 보미는 어른이 왜 사과를 못하냐며, 엄마 암 걸렸다고. 병신 같이 살다가 암 걸려 죽게 생겼다고 소리를 친다. 보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몰리고 난감해진 희숙은 안절부절. 어딘가 쿵쿵하는 소리, 식당 통유리에 자신의 머리를 찧는 아버지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미옥의 지랄 말고는 텐션이랄 게 거의 없던 영화는, 아버지의 생일 축하 자리에서 답답하리만치 누르기만 했던 인물들의 감정을 대폭발시킨다. 증오했던 아버지의 생일을 챙기며 집안의 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러나 마침내 폭발하고만 미연의 흥분된 눈빛은 미옥이 보기에 아버지와 닮았다. 그렇게 말하는 미옥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처럼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고, 다만 아이에게만은 그러지 않을 뿐이다. 보미의 발설로 자신의 병이 밝혀진 희숙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비싼 밥, 미연이 오십만 원이나 들여 준비했지만 진섭의 난동으로 모두 버리게 생긴 밥 중 멀쩡한 부분을 목사에게 권하며 자신이 먼저 입에 욱여넣는다. 아...
막판에 너무나 극적으로 터지는 포텐에 좀 당황스럽기는 했는데, 지옥에서 온 소녀 보미의 힙한 말들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영화는 잠시간의 미친 듯한 텐션에서 금세 진정하고 돌아온다. 세자매는 병실에 누운 진섭을 챙기고 나와, 미연과 미옥이 멍게비빔밥과 회냉면을 먹었던 식당을 찾아보고 어릴 적 유일하게 함께 찍은 사진 속 바닷가 장기자랑 장소도 찾아보며 평범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어렵사리 꺼낸 희숙의 부탁으로 셋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영화는 환하게 마무리된다.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웃었다고 해피엔딩일 수는 없을 테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도 분명 때로 웃기는 했을 테니 그러한 날들 중 하루의 한 순간에 카메라가 멈춘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열린 결말이라기보다 그냥 과정에서 물러난 엔딩이랄까. 눌러뒀던 감정을 폭발시키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건 없고, 만일 아버지가 각 잡고 사과를 했더라도 그 오랜 트라우마가 단번에 사라지거나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심연의 상처를 묻어둔 채 수십 년을, 각자의 방식대로 이상하게 살아온 세자매의 날들이 예전과 한치도 다름없이 흘러가지만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엔딩크레딧과 함께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아요"가 흘렀는데 솔직히 당황했다. '내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 내 마음이 헛된 희망이라고는 말하지 말아요 ... 그대 없이 나 홀로 하려 한다고 나의 이런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나를 설득하려 말아요' 영화 잘 만들어놓고 왜 이러지? 그러나 마지막 노래가 있었다. 제목은 확인 못 했지만 "찢어버릴까"가 반복되는, 영화와 매우 어울리고 막되먹은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였다. 덕분에 크레딧 마지막까지 다소 안정된 마음으로 잘 보고 나올 수 있었다. 크레딧 보며 좀 의아했던 건 굳이 문소리가 처음으로 나오는 것. 가나다순이건 역할 상 나이순이건 첫째가 먼저인 게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세자매 중 대장 역할이고 비중이 커서? 제작에 참여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이해가 안 됐다.
영화는 여러모로 인상적이고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데,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버지와 미연을 통해 폭력성과 가식성을 도드라지게 드러낸 부분이었다. 김선영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들었고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극단 이름이 '나눔과 베품'에서 딴 극단나베라고 들었는데, (각본과 감독을 맡은 남편은 기독교인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암튼) 영화에서 그려진 교회의 조직 문화와 만들어낸 캐릭터들이 꽤 신랄해서 다소 의외이기도 했고 그런 객관화가 반갑기도 했다. 교회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라기보다 어쩌면 잘 아는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활용해 인물의 가식성을 더 부각시킨 것일 수도 있고, 실제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필요한 이들 중 많은 수가 신앙에 의지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1/29, 롯데시네마통영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