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0. 8. 13. 00:37

 

 

샹미호수놀이공원의 관리초소 지키는 일을 하는 샤오둥과 꽃집에서 일하는 주안은 가난한 연인이다. 샤오동과 주안은 습기 가득한 작은 집, 모기장 텐트가 얹힌 침대와 화장대면 꽉 차는 방에서 주로 붙어 있지만 시덥잖게 주고 받는 몇 마디 외에 대화랄 게 없다. 주안은 그런 샤오동이 불만이지만 말이 곱게 나오지 않고, 말문을 닫은 샤오동은 주안에게 때로 강간에 가까운 시도를 하다 저지당하는 황량한 관계를 이어간다. 

 

샤오동은 여섯 살에 극단에 들어가 중국고전 기예를 익혀온, 놀이공원의 소형무대에서 공연하기도 했던 배우이기도 하다. 놀이공원 매표소에서 일했던 주안은 샤오동의 공연을 본 적이 있지만, 지금 놀이공원은 사라져가는 중이고, 그녀가 일했던 매표소도 그 흔적의 잔해들만 남았다. 낡고 소박한 놀이공원이었지만 둘에게는 몇 없는 소중한 장소이자 추억. 하지만 샤오동은 소형무대를 없애기로 한 공원측에 일방적으로 해고를 당했고, 꽃집에서 일하는 주안은 '이상한' 집으로 꽃꽂이 출장을 나가는 것으로 생활하고 있다. 

 

지금의 모습이 무엇이든 무대에 서는 꿈을 잊지 않은 샤오동은 하릴없이 탁구공을 튀기고, 풍파 속에 극단을 이끌어온 옛 사부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미래를 기약하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딱히 현실을 바꿀 기회는 없다. 주안에게 그런 샤오동은 어릿광대가 배달하는 꽃집을 홍보할 수 있는 계기 정도, 샤오동 역시 우스꽝스러운 입성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전단을 붙이고 배달하는 일을 마다하지는 않는다. 아무려나 연인인 둘, 그러나 한 집에 사는 생존파트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일상에는 적막하고 습기 가득한 공기만큼이나 불쾌한 기운이 자주 엄습한다.

 

샤오동은 놀이공원 초소에서 우연히 만난 주안주안의 라이브 방송 듣기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병원에 가도 진단이 나오지 않지만 자신에게 병이 있다고 믿는 그녀는, 무용을 했었고 많은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냥 자신의 이야기를 불특정다수의 라이브방송 청취자들에게 들려주고 이따금 찾아오는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라이브방송에 열중하던 어느날 주안주안의 집에 찾아간 샤오동은 이후 차츰 그녀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진다.

 

퇴락한 고성 같은 저택으로 꽃꽂이 출장을 나가는 주안은, 그 집에 들어오면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한다는 일방적 규칙이 께름직해 무시하다가 관리인에게 쫓겨날 뻔했지만 주인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미스테리한 공간과 인물이 주는 분위기에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지만 알 수 없는 끌림도 부정할 수 없는 그녀에게, 주인은 덤덤하게 곁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샤오동은 주안주안과, 주안은 주인 롱과, 연인인 서로에게서 사라진 끌림을 느끼며 아주 조금씩 일상의 활기를 찾아간다. 주안주안의 집에 방문해 원하는 대로 가구를 옮겨주고 대화를 나누곤 하던 샤오동은 그녀에게 손오공 독무를 선보이고 그녀 역시 답례로 한 사람을 위한 춤을 선보인다. 주안은 9년째 수감 중인 형을 만나러 가는 롱의 면회길에 함께하며, 몇 마디 오가지 않는 대화 속에 어느 정도는 서로를 이해한다고 느낀다. 누군가에게 드러낼 수 없는 엇갈린 관계, 그러나 그 밀도를 조금씩 높여가며 네 사람은, 무참한 고독 속에 홀로 지내며 각자 비밀처럼 오가던 병원과 감옥에 동행할 정도의 사이가 되지만... 그뿐이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짓누르는 무게와 습기는, 우연히 만난 타인에게 끌리고 마음을 열면서 잠시 감도는 일상의 생기를 고양시키지 않는다. 주안에게 하던 대로 폭력적으로 선을 넘으려던 샤오동은, 다시는 주안주안을 찾아갈 수 없다. 9년째 이어지는 연례행사에 동행한 주안과 롱의 시간이 다음해로 이어질 것 같지도 않다.

 

'습한 계절'은 웃지도 울지도 않으며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 같은 네 사람이 무참하도록 건조한 일상을 견디는 방식을 보여주는 영화 같기도 했다. 영화는 손오공 분장을 제대로 한 샤오동이 늘 오가던 골목에서 환상처럼 춤사위를 펼치며 끝났던 것 같다. 명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기예로 무대에 서는 꿈을 붙들고, 성폭력이 아닌 이성에 대한 표현은 할 줄 모르는 샤오동, 무어라고 변명해줄 거리가 없는 주인공의 처연한 상상. 영화 속 대기와 분위기를 통해 관계와 현실을 그려내는, 독특하고 여운이 깊은 영화였다.



8/10 cgv명동역씨네라이브러리 김기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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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