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1. 1. 19. 00:33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헬렌은 음반을 내고 가수로 활동하기 위해 1966년 뉴욕으로 왔다.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린 딸 트레이시와 함께 호주를 떠나왔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찾아간 레코드사에서는 남성밴드 일색인 음악계에 여성의 자리는 없다 하고, 초라한 호텔방에 장기투숙하며 허름한 클럽에서 노래하는 그녀의 페이 역시 밴드의 남성멤버들보다 적다. 꿈을 찾아 이주를 감행했지만 여성이자 미등록체류자인 헬렌이 마주한 것은 가혹한 현실이다. 뮤지션이었던 부모를 따라 유랑하며 성장했고 일찍부터 무대에 서며 무엇보다 노래하는 꿈을 우선순위로 두고 살아가는 그녀의 하루하루는 힘겹다.

외롭고 도움이 필요했던 헬렌은 전화번호부에서 호주 출신 릴리안 록슨의 전화번호를 찾아내고 망설임 끝에 연락해 만난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릴리안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뷰티며 살림 등에 관한 기사를 쓰고 있지만, 로큰롤 백과사전 집필을 꿈꾸는 페미니스트다. 릴리안과 헬렌은 첫만남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다. 트레이시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헬렌의 꿈을 응원하며, 릴리안은 뉴욕의 뮤지션들이 모이는 클럽을 안내하고 헬렌의 생일파티를 열어 지원금을 모으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함께 맞서자", 둘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동지이자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릴리안이 주최한 파티에서 헬렌은 엔터업계에서 일하는 제프 월드를 만나 연인이 된다. 헬렌의 재능을 알아본 제프는 "당신은 노래하고 사업은 내가 한다"며 함께 LA로 가자 제안하고, 그들은 뉴욕을 떠난다. LA에서 가족으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헬렌과 트레이시와 제프, 가수 생활의 발판이 될 거라며 가진 돈을 끌어모아 수영장이 딸린 집을 계약한 제프는 자신의 일인 매니지먼트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무대에 서는 꿈을 위해 온 LA에서 가정주부 신세가 된 헬렌은 착잡하고 초라하다. 제프와의 관계에서도 심심치 않게 불화가 발생한다.

마음먹고 제프를 몰아부친 끝에 헬렌은 싱글음반 녹음 계약을 따내고,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히트를 통해 성공적으로 음악계에 진출한다. 뉴욕의 릴리안 역시 꿈에 그리던 '로큰롤 백과사전' 집필을 마치고 발간된 책과 함께 헬렌을 방문한다. 즈음 미국 전역에서는 여성참정권 쟁취 50년을 앞두고 양성평등 헌법 개정을 위한 여성운동이 한창이고, 릴리안은 행진 참가 등 여성의 권리를 위한 움직임에 동참하며 헬렌의 마음을 고양한다.

억눌렸던 여성의 목소리가 분출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헬렌의 음악에도 영향을 끼친다.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지만 여성으로서 살아오고 노래하면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차별받았던 그녀의 경험은 "I am woman"에 고스란히 담겨 노래로 발표된다. 레코드사 남성 결정권자들의 우려와 오판을 보란듯이 뒤집으며, "I am woman"은 큰 반향과 함께 헬렌을 당대 음악산업의 중심으로 이동시킨다. "I am woman"은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양성평등 헌법 개정을 위한 여성운동의 주제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노래가 된다.

헬렌은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가진 가수로 입지를 굳히고 승승장구한다. 제프는 음악은 물론 영화에까지 진출해 매니지먼트 업계의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었지만, 부와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심각한 코카인 중독에 빠져 있다. 헬렌의 페미니즘적 발언을 상업적으로 또 전술적으로 이용하며 제법 효율적인 팀으로 함께 일하던 둘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음반 속지에 흔쾌히 해설을 써주며 노래의 꿈을 응원했던 릴리안과의 관계도 변화했다. 소울메이트와 같았던 릴리안은 지병인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성공에 취하고 가족이 소중해진 헬렌은 그녀와 소원해졌다. 록 컬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릴리안과 거리를 두라는 제프의 말에 발끈했지만, 헬렌 역시 그러한 점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투어 중 그녀를 방문한 헬렌은 폴 매카트니와 린다에 관한 릴리안의 기사를 언급하며 선을 긋는 말과 함께 돌아선다. 딴소리지만... 어수선한 릴리안의 집에 들어서 어색하고 할 말 없는 헬렌이 식탁 위의 꽃을 보고 예쁘다고 하자, 자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데이빗 보위가 보내줬다고 릴리안은 말하는 대목이 있었다. 실화겠지? 다정한 사람이었구나! 

병색이 완연했던 릴리안은 헬렌이 떠난 직후 천식 발작으로 세상을 떠난다. 공연 직후 부고를 전해 들은 헬렌은 오열하며 자신의 모진 말을 후회하지만, 투어와 인터뷰 일정으로 장례에도 참석할 수 없다. 막막하기만 했던 뉴욕에서 자신을 믿고 응원해준 유일한 동지이자 친구, 릴리안과의 우정을 기억하고 그녀를 애도하는 헬렌의 노래가 흐른다. 하지만 회한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고, 이미 헬렌도 주변도 많이 달라졌다. 

마약 중독에 의처증까지 겸비하게 된 제프는 헬렌이 모르는 사이 경제적으로도 많은 것을 탕진한 상태다. 투어 중 제프의 폭력소동으로 기절했던 헬렌은, 자신의 집은 물론 많은 재산이 날아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첫만남에서 경제적 야망을 드러내며 서로를 알아보았던 무일푼의 헬렌과 제프는 십수 년이 지나 엄청난 부를 거머쥐고 따로 또 같이 꿈을 이루었지만, 성공 이후의 현실에서 진정 소중한 것들은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헬렌은 모든 것을 청산하고 집을 떠난다. 그토록 꿈꾸고 사랑했던 노래, 이뤄진 꿈을 증명하듯 집을 장식했던 여러 장의 골든디스크는 오래 함께한 가정부에게 미련없이 넘긴다.  

영화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성장한 딸 트레이시의 부탁으로 전미여성기구의 집회 무대에서 "I am woman"을 부르는 헬렌 레디의 모습이다. 노래를 떠났던 그녀는 딸의 응원으로 용기를 내어 무대에 올라, 여전히 차별받는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과 함께 "I am woman"을 부른다. 영화는 마지막에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멘트와 함께 양성평등 헌법은 아직도 개정되지 않았다고 자막을 덧붙인다. 헬렌 레디는 영화가 완성된 뒤인 2020년 9월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엔딩크레딧에 그녀가 고마움을 전하는 이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중에는 제프 월드의 이름도 있었다. 

좀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전반부와 중후반부 이후의 밀도와 완성도의 차이가 심하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여러 인터뷰에서 감독이 말했듯 영화 제작 당시는 세계 전역에서 미투운동과 더불어 억눌려왔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시기였다. 영화는 이전 세대에게 또렷하게 각인되었던 헬렌 레디의 존재와 "I am woman"을 통해 억압된 여성의 삶 그리고 권리를 위한 투쟁과 연대의 역사는 늘 현재진행형이었음을 환기한다. 감독의 메시지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는지, 미국에 당도한 헬렌이 음악산업이 진입하기 이전까지 영화는 캐릭터와 상황 전개가 너무나 단순하고 평면적이어서 사실 당황스러웠다.

중반부터 어느 정도 몰입하며 볼 수 있었는데, 뮤지션이자 수퍼스타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하며 노래하는 헬렌 레디의 무대와 삶이 작위적인 연출 없이 생동감 있게 그려진 덕분인 것 같다. 중반 이후부터 그녀의 여정과 미국 양성평등 헌법 개정을 위한 여성운동 및 반대 진영의 현황과 결과가 짤막하게 대비되는 편집이 반복되었고 다분히 감독의 시선과 해석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권리와 투쟁이 집단과 집회를 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크게 매력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시대를 가로지르는 진심들이 모여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1/18, 롯데시네마통영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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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