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11. 5. 15. 21:45


책을 손에 넣은 것에 비하면 참으로 오랜 동안 묵혀두었다. 얼마 전 오랜 만에 여행기를 읽고 잔뜩 달뜬 마음이라도 멀리 떠나보내보자고 펼친 책장이었다. 정보가 전혀 없는 저자와의 만남일 경우 나는 머릿말이나 후기에서의 첫 느낌이 책에 대한 많은 것을 좌우하는 편인데, 저자가 책을 내기까지 도움을 준 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나 혹은 가족에 대한 살가움을 언급하면 독서 이전에 상당히 부드러운 호감을 갖고는 한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스쳐간 적도 없고 별달리 아는 것도 없는 라틴 아메리카 땅을 안내해 줄 저자의 인간적인 따스함이 느껴져 좋았다.
 

책의 내용은 라틴 아메리카의 4개국, 쿠바 페루 칠레 멕시코 문화기행이고, 저자는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학계의 남미 전문가라는 것이 책날개의 소개에서부터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 역시, 게바라의 혁명과 관련하여 쿠바를 선망하고 쿠스코와 마추픽추의 페루를 동경하며 남미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온 독자다. 90년대 말부터 심하다 싶으리만치 동어반복으로 출간되는 게바라표 책들의 홍수와 출판계에서는 꽤나 친숙해졌지만 실제로 땅 한 번 밟아보기에는 여전히 엄두낼 수 없는 비싼 여행인 남미땅의 물리적인 거리를 생각할 때 이 책은 참 고마운 안내서다.
 

저자는 다분히 학술적이고 정통적인 관점에 입각해 남미의 역사와 문화, 옛날과 오늘 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혁명의 성공과 미국과의 맞짱으로 조금은 과장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혁명 쿠바의 그늘과 변화의 단면들, 풀리지 않는 신비를 간직한 유적과 신화의 그늘 속에서 동시대적 의미가 가려져버린 페루의 지난한 현대사, 하염없이 길기만 하여 우리 농촌에 가없는 위협을 가하는 아옌데와 네루다의 나라 칠레의 문화와 사회, 선인장과 데낄라 리베라와 프리다라는 파편적인 상징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었던 멕시코의 유장한 역사를 너무나 고맙게도 저자는 전공자의 예리한 시선과 풍부한 감수성을 통해 매우 다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학적 혹은 문화적 소양으로 충만한 작가들의 감성적인 여행기와는 차별화되는 깊이 있는 정보들은, 오랜 동안 학문적 대상으로 남미를 탐색해온 저자가 아직은 미지의 땅이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가보고픈 소망을 가진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간접 체험이다. 대륙간의 거리 만큼이나 정서적으로도 멀기만 한 남미의 나라들에 대한 일반의 무지와 몰이해, 그 위에 덧칠된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변방을 향한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대해 저자는 끊임없이 환기를 시도한다. 또한 제국주의적 세계화의 열풍 속에 진원지를 알 길 없이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온 남미의 풍부한 문화적 자산들에 대한 애정어린 주목을 잊지 않는다. 머릿글에 밝힌 바대로, 신변잡기나 인상기를 넘은 여행기를 목적한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반영된 것이다. '기행'으로 분류되는 책들 중에서는 단연코 돋보이는 밀도와 충실도를 자랑하고 있다. 언제가 될런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비행기를 타고 아바나에 닿을 때' 내 손에 들려있을 책이 아닐까 싶다.


2005-03-14 08:10, 알라딘



배를타고아바나를떠날때
카테고리 여행/기행 > 기행(나라별) > 북/남미아메리카기행
지은이 이성형 (창작과비평사, 2001년)
상세보기
 

 

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