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4. 18. 23:55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는 1970년대 초반 지어진 동작구 상도동 강남상가아파트 그리고 그곳에 살고 있는 같은 나이의 한 사람을 이야기하며 시작된다. 1971년에 태어나 한국 나이 세 살에 미국으로 입양된 레인 포스터볼드이자 김일환, 그는 40여년 만에 만난 친엄마 김숙연과 함께 강남상가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 입양 가족의 이야기들 중에는 자녀의 원망과 부모의 회한 같은 어렵고 묵은 감정들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은데, 이 영화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는 그대로 두고 현재에 집중하는 느낌이었다. 눈물과 아픔의 시간을 통과했기에 가능한 걸까, 눈만 마주쳐도 똑닮은 웃음을 나누는 두 사람이 놀라웠다. 


영화의 시간은 레인이 엄마와 함께 산 지 1년 반가량 된 시점부터다. 레인은 멀리까지 한국어를 배우러 다니지만 엄마와의 원활한 의사 소통은 쉽지 않다. 말이 통하지 않는 모자는 눈치와 몇 마디의 단어들과 바디랭귀지로 서로를 읽고 자신의 뜻을 전한다. 말보다 빠른 것은 표정과 운동과 음식 그리고 어린 형제들처럼 몸을 부대끼는 애정 표현이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건너 한국으로 날아온 아들은 엄마에게 기쁨이고 웃음이고 자랑이다. 어릴 적에 미국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잘 성장할 수 없었으리라고, 엄마는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들에게서는 서운함이나 원망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미국의 부모님께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고, 이제라도 친엄마 품에서 아기처럼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걸 행복하게 여기는 것 같다. 똑닮은 엄마와 아들은 깊은 속내를 드러내는 일 없이 해맑고 큰 웃음을 나누며 짧은 말들과 함께 살아간다.

 

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즈음, 갈등의 불씨가 되는 것은 레인의 담배다. 집안에서 피우지는 않지만 좁은 집에 함께 사는 유방암 환자인 엄마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 정말 담배만이 이유였을까 싶지만, 레인은 엄마의 집을 떠난다. 반평생 이상 홀로 살았을 엄마와 다 큰 아들의 어느날 갑자기 시작된 동거는 2년을 넘기지 못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화와 결별 같은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붙어 있었기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핏줄 연결의 엄연함보다 낳고 기르고 의존하는 상호 관계로 점철된 이십 년 가까운 체험이 부모와 자식을 뗄 수 없는 가족으로 연결하는 요체라고 말해도 된다면, 그런 경험이 결여된 채로 다시 만난 모자의 초밀착 상태는 실은 좀 무리한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원룸을 얻어 독립한 레인의 일상은 별로 나오지 않는데, 비슷한 한국어 실력의 지인과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저씨의 하모니카 연주를 듣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외국에서 가출한 청소년들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아저씨의 말을 흘리면서도 애수를 띤 하모니카 연주에 마음을 얹는 모습은 처음으로 크게 보이는 쓸쓸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즈음 레인은 친아버지를 찾는 중이었다.

 

엄마와 레인이 제대로 주고받아야 하는 이야기가 있을 때는 전화 통역이 등장한다. 엄마는 레인의 아버지 찾기가 달갑지 않고, 별로 고집스러워 보이지 않는 레인은 그래도 궁금하다. 어쩌면 말란다고 말 수 있는 문제가 아닐지 모르고, 멀고 낯선 땅까지 엄마를 찾아온 레인이 아빠를 찾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레인의 생일상을 차려준 곳은, 입주 간병인으로 돌보는 할아버지의 집이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오랜만에 먹으며 레인은 그 사이 딴 운전면허증을 내보이고, 얼마 후 모자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엄마는 레인의 부모를 만나 꼭 감사를 전하고 싶고, 회복 중이고 일도 하고 있지만 몸이 견딜 수 있을지 비행을 테스트해보는 목적도 있다. 비좁은 아파트를 벗어나 탁 트인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는 엄마와 아들의 표정은 환하고 환하다.

 

친아버지를 찾던 레인에게, 미국 아버지의 부고가 전해진다. 영화에는 레인이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하는 단란한 모습을 담은 홈비디오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젊은 서양인 부부와 어린이 그리고 작고 마른 동양인 아이가 담긴 화면은, 레인이 양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행복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한 세대의 시간이 지난 홈비디오와 나란히 보여지는 인물들의 현재 모습은, 다큐를 통해 처음 만나는 것임에도 선연한 세월과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근원을 확인하고픈 열망 같은 것들로 생각을 데려갔다. 양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레인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친엄마가 미국에 온다. 얼마 전 제주도행으로 처음 비행기를 타봤던 엄마는 씩씩하게 홀로 미국에 도착했다. 생활력도 친화력도 남다르고 참 밝은 엄마의 언행은 미국에서도 변함없지만, 레인을 한국으로 보내던 즈음에 대해 묻는 미국 엄마의 말에 답하며 복받치는 심정은 어쩔 수가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한 아이의 엄마로 마주한 두 사람의 만남은 판타지처럼 다정하고 평화롭다.

 

한국으로 돌아온 레인은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친아빠를 확인하고, 동생뻘이 되는 남성과도 만난다. 엄마와 함께 그들이 사는 곳에 가고 친아빠의 산소에 인사도 드린다. 세상에 없는 친아빠를 통해 연결된 가족과도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을지도 모르지만 함께 담배를 피우는 '동생'과 레인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친아빠를 찾으며 레인이 바랐던 것이 그저 자신을 있게 한 뿌리를 알고 싶은 갈망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다른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세상에 없는 두 아빠와 각각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두 엄마를 둔 레인의 삶과 운명은, 픽션이었더라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양 경험을 (다큐에 드러난 만큼) 레인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도 같지만, 입양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헐적으로 접하며 굳어진 피상적인 생각들이 꽤 일률적인 편견이었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생일날이었으므로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엄마가 보내준 음식들로 제대로 된 밥을 먹을까도 생각했는데, 그래도 부산에 온 김에 시간 맞는 영화를 더 보고 가자 싶어 선택한 거였다. 소개로 대략의 내용을 짐작하고 별다른 기대나 감흥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엄마아빠가 살고 계시고 나도 잘 아는 동네가 배경이라서 영화가 더 가까이 와닿는 느낌이었다. 엔딩 크레딧 출연진 중 세 번째로 등장하는 상도동 ‘강남상가아파트’에는 내가 가봤던 식당도 있고 좋아했던 빵집도 있다. 맞은 편 대로변에서 그 건물을 잡을 때면 엄마아빠가 살고 계시는 아파트 동이 보이기도 했고, 촬영이 한창이던 때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가서 밥도 먹고 먹을 것도 싸들고 오고 했던 터라 각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엄마가 사는 바로 근처에 살고 있는 레인과 엄마를 보며, 무례한 가정이겠지만 어느 순간은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익명의 도시의 수많은 집들 속에는 한 겹만 들어가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 구석 한 순간이라도 내 삶과 겹쳐지면 그건 조금 다른 빛깔로 다가오는 것 같다. 


4/18 cgv서면 임권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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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