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2. 3. 25. 23:18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최상위권 성적의 배경 좋은 집안 아이들이 절대다수인 동훈고에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한 지우는 마음이 무겁다. 선행 학습을 마친 동급생들 사이에서 뒤처진 성적이 고민이고, 성적 지상주의와 빈부 격차에 대한 차별에 의기소침하고, 최하위권 성적인 수학을 담당하는 담임은 그런 지우를 걱정하는 척하며 전학을 권한다. '사배자'임이 알려져 은근히 왕따이기도 한 지우는 술과 야식을 배달시키는 룸메이트와 친구들 사이에 마지못해 끼었다가 야간 순찰을 도는 경비 노동자에게 딱 걸린다. 주류 반입 행위를 혼자 뒤집어쓰고 한 달간 기숙사 퇴사 벌칙을 받은 지우에게 동훈고는, 10년 전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아빠가 돌아가신 후 지우만 바라보고 견뎠을 엄마의 뿌듯한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동훈고의 경비 노동자인 박씨는 어느 날 야간 순찰을 돌다가 술과 야식을 반입하는 '종간나' 지우를 적발했다. 소시적 수학 영재였고 세계적인 수학자였던 리학성은 자신의 연구가 무기 개발에 쓰이는 현실을 견딜 수 없어 수년 전 탈북했고, 전적을 숨긴 채 경비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북한 말투와 어휘를 버리지 못한 그의 탈북 사실은 학생들에게도 알려져 '인민군'으로 불린다. 무심하게 자기 일에만 집중하며 딸기우유를 끼니처럼 마시는 괴팍하고 성마른 노인네지만, 기숙사에서 쫓겨나 폐쇄된 과학관 앞에 숨어든 지우를 지나치지 못하고 경비실에 재워준다. 그리고 지우가 잠든 사이 짐에서 떨어진 수학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 일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동급생들처럼 과외나 고액 학원에 갈 수 없는 지우는 내신에 큰 비중으로 반영되는 수학 올림피아드를 앞두고, 인민군에게 어렵사리 어필해 딸기우유를 수업료 삼은 가르침을 허락받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수학 외의 질문은 하지 말 것, 시험과 성적과 무관해도 받아들일 것"을 약속하고 시작된 공부는 지우에게 답이 아니라 풀이 과정의 중요성과 뒹굴면서 친해져야 하는 수학의 세계를,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조금씩 일깨우는 시간이다. 폐쇄된 과학관 교실에서의 밤 공부를 위해 손수 여러 개의 스탠드를 장만한 인민군의 얼굴 역시 평소의 퉁명스러운 무표정을 벗어나 수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무아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공간과 시간을 함께하며 경직됐던 마음의 벽을 서서히 허물며 가까워진다.

보람은 이기적인 동급생들 사이에서 굳이 의리를 지키다 덤터기 쓰고 기숙사에서 쫓겨난 지우가 궁금해졌다. "똥멍청이"라 부르며 접근해 "꺼져" 소리를 들으면서도 지우를 주시하며 다가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보람 역시 비경제적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입학했지만 부유한 환경과 우수한 성적 덕분에 그 사실은 알려지지도 않았고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어느 날 생긴 작은 오해를 풀기 위해 지우가 매일 사대는 딸기우유를 건넨 보람은, 독서실에서 나가는 지우를 몰래 따라나가 그들의 밤 공부 현장에 함께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인민군의 예상 외 반응으로 비밀은 세 사람의 것이 되고, 인민군과 보람은 먼지 쌓여 방치된 피아노로 원주율 숫자로 만든 "파이송"을 연주하며 환상적인 수학과 음악의 콜라보를 경험한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각자의 이유로 소외되고 상처 받은 세 사람은 수학과 음악을 통해 나이와 편견을 넘어서는 은은한 우정의 시간을 보낸다. 특히 지우와 인민군은 함께 대형서점에 가고, 음악회에서 "G선상의 아리아" 연주를 듣고, 인민군의 집에서 손수 차려준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과학관과 수학에 국한되었던 교분의 외연을 넓힌다. 입밖에 내지 않지만 인민군은 지우를 보며, 자신의 욕심으로 함께 남한에 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북으로 가려다 목숨을 잃고 만 아들 태현을 떠올리고 애써 지우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10년 전 갑자기 아빠가 떠나고 일찍 철들어야 했던 지우에게 인민군은, 슬며시 기대고 싶은 좋은 어른으로 마음속에서 그 자리를 키워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화는 잠시다. 보람은 자신이 학원에서 접한 문제들이 그대로 출제된 수학 올림피아드에 분노해 시험장을 박차고 나가고,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방안에 틀어박혀 절망하다 문제 유출 폭로글을 올린다.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수학 논문을 보는 인민군을 위해 시험 전날 행정실에서 논문을 인쇄한 지우는 출입 순간이 찍힌 cctv로 인해 문제 유출 당사자로 몰린다. 인민군에게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남한에 와서 몰두했던 리만 가설 입증이 학계의 인정을 받아 남북의 정보 당국이 '수학자 리학성'의 소재 파악과 신병 확보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남한 적응을 도우며 인간적인 정을 나누던 영등포 고물상 사장이 국정원 직원의 신분을 드러내며 그의 앞에 나타나고, 리학성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배신감과 허망함으로 짐을 꾸려 떠난다.

자신의 부정을 감추기 위한 담임의 계략과 압박으로 문제 유출자로 낙인 찍힌 지우는 결국 전학 신청서를 제출한다. 담임의 유착과 익명 폭로의 희생자가 된 지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보람은 리학성에게 연락해 사정을 설명하고, 떠났던 리학성은 수학 올림피아드 시상식이 열리는 동훈고 강당으로 돌아온다. 이 순간을 위해 학교에 나온 보람은 짐을 챙겨 교문을 나서는 지우를 강당으로 이끈다. 마침 시상을 위해 참석한 수학자와 '만년필'을 통해 본인임을 증명한 리학성은 단상에 올라 인민군이 아닌 수학자로서, 그리고 함께 공부했던 한지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줄 어른으로서 긴 이야기를 전한다. 좌중을 압도하는 그에게 발악하던 담임은 본색을 드러내며 퇴장하고, 강당에서 나온 그를 기다리던 국정원 직원은 자신이 마련해준 휴대폰을 차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여권과 비행기표를 건넨다. 그리고 3년 후, 수학과 학생이 된 지우는 오버볼파크 수학연구소로 향하고 수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리학성에게 딸기우유를 건네며 조우한다.


'수학'이라는 주요 소재가 볼까말까 갈등을 부추겼지만 최민식 배우와 괜찮은 후기들 덕분에 보게 되었는데, 역시나 리학성이 매료된 수학의 아름다움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좋은 선택이었다. 오랜 불면증에 시달리며 약을 달고 살던 인민군이 경비실에서 함께 잠을 청한 지우의 휴대폰을 통해 "G선상의 아리아"를 들으며 간만에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게 흐뭇했고, "딸기우유 때문에 탈북했어요?" "너 똥 먹네?" 같은 대사가 너무 웃겼는데 강조되거나 튀지 않고 흘러가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직접적으로는 리학성과 지우, 보람의 한 달여를 다루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리학생의 소시적과 탈북 후 아들의 죽음 나아가 남과 북의 상황까지 연루된 이야기여서 간명한 설명을 위해 방송 화면을 몇 차례 활용했음에도 불가피하게 돌출적으로 느껴지는 지점은 있었지만 말이다. 극적인 순간의 임팩트를 위해 설정했을 만년필이나 딸기우유 등의 디테일이나 마지막 리학성의 장광설이 다른 방법을 없었을까 싶어 조금 아쉬웠지만, 다행히 과하게 오글거리는 부분은 없었다.

크게 기대를 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영화가 괜찮아서 여운에 젖어 있는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전방 좌측의 출입문이 열렸고 몇 안 되던 관객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하자 극장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여러 개 관이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상영이 끝난 후 청소 노동자의 마음이 급할 것은 이해가 되지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불을 켜버리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아트하우스관이 아니니 자막까지 다 보고 나가는 게 눈치 보이겠다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꼭 이래야 하나 싶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일반관은 보통 엔딩 크레딧 시작과 함께 퇴장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조도로 불이 밝혀지는데 실은 그것도 별로지만, 자막 안 보고 나가는 관객은 나가더라도 전체 점등과 청소만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후에 해주면 정말 좋겠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청소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극장 정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3/25 cgv거제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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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