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40년대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일면들은 흥미로웠지만, 성공을 향한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따라 파멸로 향하는 스탠의 여정은 솔직히 너무 장황하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도 괜찮았지만 개인적으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를 무척 재미있게 보았었는데, 그야말로 미로를 따라가듯 인상적이었던 서사의 총체적인 유기성 같은 걸 느낄 수 없어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를 죽인 스탠이 우연히 유랑극단에 합류하고 그곳에서 인생을 바꿀 독심술을 배우고 몰리와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영매를 자처하며 성공과 추락의 경계를 걷는 과정에서 이상하게 긴장감이나 흥미진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탠의 공간 이동에 따라 새롭게 등장하고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 들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듯 어색하거나 억지로 짜맞춘 것처럼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지난 10년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이라는 홍보 카피가 무색하게 (당연히) 처음부터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후반부에서는 거의 수순처럼 느껴지는 결말이어서 더 맥이 빠졌던 것 같다. 어둡고 비밀스럽지만 매혹적이고 환상적이었던 감독의 전작 덕분에 기대가 컸던 탓이겠지만 "내가 엄청난 얘기해줄게" 하고는 별 대단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다가 허무하게 마무리가 된 느낌이었달까.
다만 기인의 존재와 유랑극단, 마술에 혹하고 불멸을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는 시대의 분위기는 새로운 느낌이었고, 섬광 같은 존재감을 남긴 [길버트 그레이프]의 카버 부인, 메리 스틴버겐의 깜짝 등장은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화려한 찬사들에 공감할 수 없어 찾아보니 윌리엄 린지 그레셤이라는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이라는데, 짧은 소개글 속의 작가에게서 스탠의 운명이 겹쳐지는 것 같기는 하다. 책을 찾아 읽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정도라도 알고 영화를 봤다면 조금은 덜 겉도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기도.
1909년 볼티모어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하여 포크가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그레셤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스물아홉 살 때 참전한 스페인 내전에서 만난 전직 순회공연단 직원에게서, 술을 얻기 위해 닭과 뱀의 대가리를 물어뜯었다는 알코올중독자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나이트메어 앨리』는 그레셤이 스스로 내면의 고통과 방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고들었던 정신분석학, 마르크시즘, 종교, 심령술 등 온갖 미로에 대한 경험이 작품 전체에 대담하고도 정교하게 직조되어 있다. 그러나 『나이트메어 앨리』의 주인공 스탠턴 칼라일처럼 그레셤 역시 자신만의 ‘악몽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작품은 출간 후 큰 파장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얻어 1947년 타이론 파워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고 미국 클래식 누아르로 자리 잡아 그레셤에게 돈과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나중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알코올중독과 신경쇠약을 극복하지 못했고 두 번째 소설과 논픽션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1946년 첫 작품을 출판 당시 이 작품을 아내(그의 세 명의 아내 중 두 번째 아내)인 시인 조이 데이빗먼에게 헌정했지만, 1942년에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던 그들은 1953년 이혼했다. (결혼 당시 그레셤과 마찬가지로 무신론자였던 데이빗먼은 남편의 정신적 추락에 절망하여 종교에서 해법을 찾고자 했고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났다. 이후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 S. 루이스를 만나 1960년 병사할 때까지의 이야기는 1993년 영화 <섀도우랜드>를 통해 알려져 있다.) 1962년, 이미 눈이 멀기 시작했고 설암 진단까지 받은 그레셤은 십여 년 전 『나이트메어 앨리』 집필 당시 드나들던 타임스퀘어의 호텔 방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 뉴욕의 가을, 53세로 생을 마감한 그의 소식에 주목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옷 주머니에는 이렇게 적힌 명함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주소 없음, 전화 없음, 일 없음, 돈 없음,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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