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를 탐독했거나 새기고 곱씹는 시구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트위터의 ‘최승자봇’ 계정을 일찌감치 팔로우해 어느 밤 마주친 짧은 문장들에 애잔하게 공감할 때가 있었다. 마음이 유난히 그러한 때에는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정작 시집 한 권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최승자라는 이름 세 글자에 무겁고 어둡고 세상의 어느 경계에 없는 듯이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러나 가끔은 기댈 만한 그늘로서의 추상적인 이미지를 더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산문집 발간 소식을 듣고 궁금해 사두었는데, 2월 모임의 책으로 정해져 반색하며 읽었다.
'배고픔과 꿈', '헤매는 꿈',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라는 제목의 4부로 구성된 책은 1976년부터 1989년까지 쓰여진 글들로 1989년에 출간됐던 판본에,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쓰여진 부분을 추가한 산문집이다. 그의 글들을 오래 품고 살았던 펴낸 이가 병상의 그를 찾아가 발간을 청했고 몇 년이 지난 후 그러마고 해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추가된 부분 역시 십 년은 전에 쓰여진 것이고, 이 책을 만들 때 시인은 글을 다시 검토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도 들었다. 일찍 죽을 것이고 자살을 할 것 같다는 확고한 예감으로 젊은 날을 보낸 그가 일흔 살이 되어 지난 산문집을 펴내며 남긴 2021년 11월 11일의 '시인의 말'은 짧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인생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어느 정도는 초월한 듯한 시인의 '말'에서는 어떤 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젊은 날 그가 쓴 산문들에서는 타고난 비관과 겨우 부여잡은 낙관이 교차하고, 운명처럼 따라붙는 회의와 우울을 떨치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읽힌다.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기억에서는 순박한 시골 정서와 조화로운 자연이 선사하는 평온함이 느껴지지만, "나의 유신론자 시절"이나 "유년기의 고독 연습"에서는 어떤 양가적 욕망의 근원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첫 글의 첫 문장은 이렇다.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세계의 폭력성과 괴로움의 운명을 토로한 시인은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싶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이라고 쓰지만 곧, "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내가 꿀 수 있는 마지막 하나의 꿈이라도 남을 때까지" 말이다.
젊은 날 그가 쓴 글에서는 일찌감치 행복을 단념한 자의 비애와 삶에 대한 적극성과 결기가 함께 드러난다. 분열적이라기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는 자의 내면이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의외로 꿈과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해마다 마주하는 달력의 마지막 장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성찰이 반복된다. 글에서 느껴지는 성인이 된 후 그의 일상은 가위눌림과 공포, 죽음이 무시로 출몰하는 무대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와 달리 어머니의 죽음 이외에는 구체적인 사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양철북 유감"을 읽으며 시의 영혼을 깊이 품고 사회와 얽혀들어 싸우고 상처받았을지도 모를 그의 20대를 함부로 상상했는데, 그냥 상상이므로 오로지 상상일 뿐이지만 자기연민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글로 마음대로 짐작한 그라는 사람이 괜히 애틋해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복작한 서울을 떠나 충무(!)며 경주며 마침내 제주도까지 건너가는 꿈을 꾸며 비현실적이라고 자가용은 삭제했던 그가 십년 후 "일중이 아저씨 생각"을 마무리하며 교외를 드라이브하는 부분에서는, '그런' 시를 쓰지만 구체적 일상도 꼼꼼히 채워나갔나 보다 싶어 과거의 그를 응원하는 마음이 되기도 했다.
20대에 읽었다면 반복해 읽으며 밑줄을 긋고 옮겨적기도 했을 많은 문장들을 심상히 넘기며 읽어나갔지만 행간의 어휘를 너머 아예 글의 주제로 삼아 죽음에 대하여 쓴 부분에서는 자주 멈칫했다.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 그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을 되찾은 것 같다."라는 문장은 어머니의 죽음을 빼면 거의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은 특별하지 않은 통과의례에 불과하지만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의 침잠은, 앓고 있는 당시의 당사자에게는 어떤 말이나 생각으로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일 수밖에 없다. 지나고 보니 그것은 욕심이거나 치기의 발로였다고 생각하지만, 자살의 용기는 없으나 사는 일을 습관처럼 회의하며 늘 죽은 이들로 향했던 어린 시절의 마음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그는 등단 40년이 넘은 시인치고 적은 수의 시집을 냈다.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물 위에 씌어진] [빈 배처럼 텅 비어], 이 중 두어 권은 사서 읽기도 했었으나 내게 시는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어서 쭈르륵 이어진 시들을 대략 살펴보고 말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짐 줄이기에 혈안이 된 시기에 중고서점에 가져다 파는 것으로 그의 시들은 우리집을 떠났다. 고요한 새벽 트위터 타임라인에 떠오르는 짧은 시구들이 오히려 내게는 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지만, 굳어진 마음을 쪼개며 새겨질 정도는 아니어서 나는 여전히 그의 어떤 문장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오래 병원 생활을 했다는 걸, 언젠가 기사로 읽었는데 잊은 채로 마지막 부분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었다. 처음 목차를 살펴보며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는 문장에 마음이 멎었는데, 흔히 생명수라 여기는 오아시스마저 죽음과 결부시키는 시인의 인식과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가 본문을 읽으며 그것이 수피즘 신비체계 이야기의 인용이라는 것을 알고 나의 깊은 고정관념에 헛웃음이 나왔다. 최승자는 내게 그런 존재로 여겨진 것 같다. 세계의 비의와 비참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고독한 자,라는 이제는 폐기된 이미지를 체현하는 마지막 시인. 많이 읽히고 회자되면 매끈한 세상의 한 봉우리에 오르는 문인들이 즐비한 시대에 그가 다시 소환된 의미는 무엇일까. 한 사람의 곡진한 마음 덕분에 내게까지 와닿은 글들에 약간 고마운 마음이 들기는 한다.
최승자
2021.11.30초판1쇄 2022.1.5초판6쇄발행,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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