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좀 급하게 읽었다. 관심있는 저작이어서 사두기는 했지만 묵혀두다가 '경제의 군사화'라는 과제 때문에 고민하다 떠오른 책이었다. 제목이 책의 모든 걸 말해준다고 할 만큼 선명하다. 2003년 이라크전 발발 당시 미국에 체류하던, 무한질주하는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에 대한 저자의 객관적인(?) 관찰과 분석의 기록이다. 미국은 여전히 몰가치한 친미와 극단적인 반미로 대한민국 사회를 종횡으로 가르는 참으로 무겁고 민감한 주제다. 하지만 책머리에서 미리 '다른 미국'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 이 책은, 미국을 엎드려 조아려야 할 역사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수구꼴통들과 경제와 문화에 있어 확고한 선진국으로 인식하며 열광하는 일부 새대가리들을 제외한, 평균적인 한국인이라면 꼭 한 번 읽고 생각해 볼 만한 매우 현실적이고 밀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전쟁, 시장, 제국, 자유, 평화, 근본주의기독교, 소비, 자기애 등은 이 책에서 미국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들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영국인들이 건설한 초기의 미국은, (인디언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말살 정책을 제외한다면) 그런대로 정의와 자유의 상징으로 취급할 만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 대전을 거치며 전쟁이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핵심적이고 효율적인 작동 기제라는 것을 인식한 뒤인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보여준 작태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 관철을 위한 살벌한 전쟁과 불합리한 정복이 거듭된 파시즘의 역사다.
군사문제와 경제문제가 동전의 앞뒷면이며 양날의 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시장과 전쟁의 연결고리는 상당히 느슨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천 수만 사람의 목숨이 달린 끔찍한 전쟁이 겨우(?) 시장의 확대와 유지를 위한 전략적 산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새삼 시장의 무서움에 닭살마저 돋아온다. 과연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이에 대한 미국의 답은, 기독교근본주의 신앙을 가진 백인을 제외한 나머지는 동등한 대접을 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겠지만 이런 오만방자한 세계지배 야욕이 세기를 넘어 가속화되고 있으며, 그런 쓰레기같은 가치가 가장 순조롭게 관철되고 또 복제되고 있는 현장이 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씁쓸하고 답답한 일이다.
저자는 친절하게 19세기 이래 미국이 구가해 온 시장근본주의에 의한 제국의 기획과 전쟁들에 대해 일별하고 있다. 절차와 형식의 구색 갖추기를 통한 민주주의 제도의 확립과 공산주의 위협으로부터 자유세계를 수호하는 세계경찰로서의 대의명분의 성립. 이를 통해 반 세기 동안 세계의 절반 이상을 유린해 온 미국은 좋은 전쟁, 나쁜 전쟁, 작은 전쟁, 잊혀진 전쟁 등 수도 없는 전쟁과 학살의 지원, 수행 혹은 방조를 통해 본국의 경제를 지탱하고 본국민들의 마음 속에 '애국'이라는 집단 문신을 새기는 데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종식된 이후 끊임없이 자기증식하던 군산복합체와 시장에 위기가 닥치자 '테러세력'이라는 새로운 가시적 위협을 상정하고, 일명 예방공격이라는 전쟁만들기를 시작했다.
항상 엔진을 켜둔 채 이미 너무나 달려버린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엔진을 꺼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엔진 과열로 폭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손에 무기, 한 손에 돈다발을 들고 세계를 조종하려는 미국에 의해 남한에 내려진 IMF의 재앙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수순이고, 그로 인한 비정규직의 양산, 노동의 유연화, 빈곤의 심화, 사회의 양극화는 전지구적인 대세라는 순응의 논리가 보편적으로 퍼지고 있다. 급격히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변화의 급물살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것이고, 좀더 잘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골몰한 끝에 내려진 고육지책은 대부분 좀더 이기적이고 차별적이고 양극화되는 방향을 가리킨다. 공동체와 연대를 이야기하는 세력들은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가진 집단으로 매도되고, 경쟁에서 탈락한 혹은 경쟁을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집단으로까지 비춰지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미국이 저질러온 세계의 황폐는 너무 어마어마해서 도무지 손을 댈(?)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말미에서 저자가 거론한 것처럼 우수한 두뇌와 자본이 미국으로 몰리고 미국은 우수한 두뇌와 자본을 움직이는 악순환의 사슬을 차단할 수만 있다면 이 끔찍한 미국 중심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미국이 아니라도 세계는 이미 정글이 된 지 오래이며 시장주의와 국가주의 또한 이제 미국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이 더욱더 절망적이다. 자본과 경쟁 논리를 받아들인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이미 신자유주의를 자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삼고 어떻게든 무한경쟁의 궤도 속으로 진입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니 말이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현상들에 대해 차분하고 객관적인 설명으로 일관하던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 '우리'라는 단어를 몇 문장에 사용한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미국이 만들어놓은 표준에서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또 '지난 백 년 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분단과 적대의 벽을 허물고 세계 다른 지역 사람들과 이웃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사실 300쪽이 훨씬 넘어가는 분량을 할애하며 전개한 내용에 비하면 마지막은 조금 뻔하고 시시한 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작은 것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그렇게 작은(?) 실천을 설득하는 것 또한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는 너무나 버겁고 어려운 작업인지 모른다. 아예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으되, 참 착찹한 책이다. 어설픈 희망의 역설보다는 솔직하지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너무나 거시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2005-06-19 18:24,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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