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4. 11. 1. 21:21

 

 

 

올해 11월 1일은 엄마의 팔순 생신날, 오랫동안 김현식 아저씨 기일로 기억하는 날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부모님 생신을 양력으로 보내기로 하면서 덮어쓰기가 됐다. 칠순이니 팔순에 잔치라는 말이 붙는 건 과거의 일이 되었고, 소소하게 식사 모임으로 대체하게 된 건 우리집도 마찬가지. 추석 때 아빠가 나름의 엄마 팔순 기획을 내놓으면서 당사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가 쪽과 한 번, 외가 쪽과 한 번, 두 번의 팔순 식사 모임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통영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라 나는 빠졌던 아빠 주도 모임은 지난 주말, 친가 쪽 사촌 언니 내외들이 대구와 수원에서 올라와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상반기 나의 여행에 자극을 받아 일찌감치 교토 여행을 예약했던 빵 만드는 사촌은 이모 팔순이라고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작업한 2단 케이크를 올려 보냈다. 아빠의 일방적인 계획에 바쁜 사람들 불러 모은다며 저어했었던 엄마에게도 괜찮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팔순날인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곳을 예약해 대구와 문경에서 오신 이모와 삼촌, 숙모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어제 저녁 서울에 도착해 동네에서 포장 주문한 전복미역국으로 오늘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이번에도 사촌은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한 고3 조카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만들어 보냈다. 이모가 내일부터 친구들이랑 서해안 여행을 가실 거여서 엄빠네서 주무시는 덕에, 점심 식사 후 나는 바로 통영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는 우리 집만 서울이고 친가와 외가 친척들은 대부분 경상도에 살았다. 방학이면 대구며 울산에 가서 외할머니네, 큰집, 이모네, 삼촌네를 전전하며 놀다 오는 게 큰 낙이었다. 개방적이고 멋진 외할머니네서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엄빠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신이 났었고, 큰집에 가면 나이 차이 많은 사촌 언니들과 오빠 내외가 조카처럼 챙겨주고 놀아줘서 즐거웠다. 간혹 친척이 우리집에 오면 신발 먼저 숨겨두고 몇 밤 자고 갈 건지 확인할 만큼, 어렸을 적 친척들은 늘 반갑고 정겨운 존재였다.

 

어른이 된 후 통 안 가다 보니 친가 쪽 친척들은 거의 못 보고 엄빠 통해서 소식만 들은 지 꽤 됐다. 큰집 사촌 오빠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다. 어렸을 적엔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당황스럽게 눈물이 나서 참느라 애를 써야 했는데, 반은 인사치레겠지만 지난 모임에 없는 나를 사촌 언니들이 보고 싶어하더란 말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고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에서 우연히 지나쳐도 서로 못 알아볼 만큼 소원해졌는데, 흐른 세월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재작년까지 몇 년간 아빠는 고향에 가족 납골묘 만드는 일에 열심이셨다. 가 본 지 너무 오래라 기억도 가물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정비해 가족 납골묘에 모시고 아빠랑 엄마 자리를 만들고, 나보고도 나중에 오고 싶으면 오라고 선심을 쓰셨더랬다. 일 년에 몇 번씩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시젠가 하는 행사까지 챙기며 고향에 가시는 아빠도, 늘 동행하며 ‘집안’의 일로 여기는 엄마도 나는 신기하다. 그분들 덕에 아빠도 엄마도 나도 있는 거고 어렸을 적의 소중한 추억도 남았지만, 조상과 가족을 동일시하는 건 여전히 낯설다. 은연 중 내 세대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을 일이고 사라질 마음이라고 생각해 더 그런 것도 같다.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까지 한강변을 걸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에서 멀지 않아 가끔 지나던 길이었는데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곳도 있어 예전 생각이 났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는 마지막 길이라, 야반도주하듯 통영으로 이사하던 날도 떠올랐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것도 무겁고 버거운데, 부모 모시고 자식 낳아 키우고 조상 챙기며 살아온 엄빠 세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은 변하고 알게 모르게 적응하며 많은 게 달라지지만 가족으로부터 연원하는 온기는 분명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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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10. 17. 01:41



추운 겨울 자정이 넘어 귀가한 명주는 거실 바닥에 코를 박은 채 숨이 멎은 엄마를 발견한다. 거두절미하고 엄마의 죽음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속도감 없는 스릴러처럼 전개된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아파트 소독원도, 엄마의 안부를 묻는 마트 사장도, 이따금 집으로 찾아오는 진천할아버지도, 겨울에 돌아가는 에어컨을 의아해하는 옆집 청년도 명주의 긴장감을 높이고 경계심을 고조시킨다. 명주는 죽은 엄마를 미라로 만들었다. 외출했다 돌아와 마주한 예기치 못한 죽음에 황망한 명주를 움직인 것은 엄마의 휴대폰으로 날아든 연금 입금 문자였다. 

 

명주는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다. 결혼하고는 부유한 시댁과 남편의 횡포에 위자료도 포기하고 이혼하며 딸 은진을 데리고 나왔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은진을 키웠지만, 도를 넘는 일탈과 뻔뻔함으로 엄마를 경악하게 했던 은진은 초라한 집을 떠나 재혼한 아빠에게 돌아갔다. 자동차공장 급식 조리원으로 일하며 화상을 입어 고질적인 발바닥 통증을 얻었고, 입증되지 않는 통증은 일상을 무력화시켰다.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생동성 알바를 눈여겨보기도 했던 명주는 결국 친정 엄마가 혼자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끊이지 않는 불운과 불행 속에 돌아온 집에서, 엄마는 치매 진단을 받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이 시작됐다. 때로는 아기처럼 때로는 폭군처럼 변하는 엄마를 아픈 몸으로 돌보면서 명주는 지쳐갔다. 꾸준히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어느 밤 홀로 떠난 엄마에게는 다달이 입금되는 연금이 있었다. 기초연금 307,500원과 유족연금 698,000원을 합친 백만 원 남짓의 돈은, 언제든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질 마음이던 명주를 잠시 멈춰 세웠다. 명주의 선택은 사회가 외면한 삶 앞에서 무색해지는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생각하게 한다.   

 

명주의 옆집에는 준성이 산다. 낮에는 뇌졸중 후유증에 알콜성 치매기가 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 생계를 감당한다. 난소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와 해외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형의 부재는 준성을 일찍 철들게 했다. 정상에 가까운 인지기능을 다행으로 여기며 아버지를 세심히 챙기는 준성은 물리치료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다. 준성이 매일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 산책하고 운동하는 집 앞 공원에는 혼잣말을 하며 트랙을 도는 여학생, 인근 요양원에서 빠져나와 아무나 붙잡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할머니가 풍경처럼 존재한다. 

 

엄마가 죽은 후 명주는 옆집 청년 준성과 수시로 찾아오는 진천할아버지 등을 통해 미처 몰랐던 엄마의 다른 모습을 만난다. 활달한 성격에 농담을 즐겼던 엄마, 부자만 사는 옆집에 반찬을 나눠주고 김장을 함께했던 엄마, 진천할아버지와 다정한 문자를 주고받고 함께할 제주 여행을 위해 돈을 모았던 엄마 그리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증평에 땅을 사두었던 엄마. 곁을 떠나 신산한 세월을 보낸 뒤 돌아와 마주한 치매 노인과는 다른 엄마의 모습을, 명주는 타인들 덕분에 뒤늦게나마 조금 알게 된다. 

 

백만 원의 연금은 명주에게 전에 없던 약간의 여유를 선사한다. 생존 이상을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명주는 대학 졸업반이 된 딸 은진을 떠올리고 선물을 하기로 한다. 아빠에게 돌아간 후 몇 년간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던 딸, 하지만 재회는 유쾌하지 않다. 떠나갈 때와 다름없이 계산적이고 자기만 아는 은진의 출현은 명주에게 새롭고도 지속적인 위기가 된다. 엄마의 사정은 알 바 없이 돈이 필요할 때만 집요하게 연락하고 찾아오는 은진의 존재는 재앙에 가깝다. 

 

소설은 701호와 702호에 이웃해 사는 명주와 준성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고립과 빈곤 속에서 홀로 간병하는 이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천형처럼 부여된 혼자만의 간병은 나날이 심신을 갉아먹지만, 간병에만 매달리기에도 버거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생계 활동이 필요하다. 병든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함께 환자로 만드는 가난과 간병의 이중고는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지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굴레다.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나선 길에는 낭패와 불운이 기다리고, 사회안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데면데면한 이웃에서 서서히 안면을 트게 된 명주와 준성은, 가족으로부터 받은 고통의 무게를 공감대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준성의 아버지가 돌발 상황으로 사망하자 명주는 홀로 전전긍긍했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먼저 경험한 각자도생 사회의 끝없는 비참을 준성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명주의 고백과 제안은 핍진하다. 소설은 두 사람이 증평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혼잣말하는 여학생과 보따리 할머니 그리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등장시키며 마지막까지 불안한 반전을 우려하게 만든다. 하지만 준성에게 ‘운수가 좋은 날’이기를 바라는 맺는 문장을 통해 독자를 공범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예전에 책 관련 팟캐스트에서 잠시지만 인상적으로 언급하는 걸 들었는데, 책 모임 10월의 책으로 정해져서 읽게 됐다. 9월의 책은 선정한 나조차도 그저 그랬었는데, 이번 책은 무거운 소재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독자를 시험하듯 시작부터 대담한 사건을 툭 던져놓고 담담하게 이어가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소설 초반 명주가 찾아보는 뉴스들처럼, 비극이나 패륜으로 소비된 기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표현을 거의 만나지 못한 덕에 ‘문학성’이란 무엇일까 라는 주제 넘는 독후감도 남았지만, 그건 내 몫이니까.

 

책 말미 몇 쪽에 걸친 ‘추천의 말’ 중 첫 글부터 ‘작가의 말’까지, 새롭지 않다거나 진부하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나 역시 읽으며 두 사람의 주인공에게 주렁주렁 매달린 갖은 고통과 불행이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이들도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면 수긍이 되는 부분이었다. 내가 겪지 않았기에 쉽게 공감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선택과 삶이지만, 선정적으로 재현되거나 사회적으로 무화되기 십상인 존재들의 이야기라는 점은 중요한 것 같다. 여러 사회 문제가 집약된 소설이지만, 나는 준성 아버지의 한 마디를 이 책의 메시지로 기억하려고 한다. “이것도 한 인생인 거야.”  



문미순
2023.4.27.1쇄인쇄 5.9.1쇄발행,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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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
비밀같은바람2024. 9. 19. 15:22

 

 

신여성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지만,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화려한 연애와 쓸쓸한 죽음의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예전에 [원치 않은, 나혜석]이라는 연극을 인상적으로 봤었는데 내용은 다 까먹은지 오래다. 책등에 자화상의 얼굴 부분이 증명사진처럼 담긴 이 책, 오래 묵었다. 가끔 책장 정리를 할 때면 앞표지의 흑백 사진과 강렬한 제목도 눈길을 끌어서, 마주할 때마다 곧 읽어야지 하면서도 게으름과 다른 읽어야 할 책들에 밀리기 일쑤였다. 작년엔가 팟캐스트 ‘게이PC방’의 예전 에피소드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관심이 생겼고, 모임에서 내 차례가 되어 9월의 책으로 [조선 여성 첫 세계 일주기]를 추천하면서 마음먹고 먼저 읽었다.

 

나혜석은 1896년 수원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18세인 1913년 경성 사립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수 졸업한 뒤, 4월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했다. 일본 유학을 한 오빠 나경석의 적극적인 추천과 개명관료였던 아버지의 후견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의 신식 교육도 유학도 드물었던 시기, 나혜석을 비롯한 여학생들의 졸업과 유학 소식은 신문 기사로도 보도됐다. 십대 중반이면 조혼 풍습에 따라 부모가 정해주는 상대와 결혼해 시집살이와 다산과 양육을 운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었던 시대였다. 

 

유학 시절 나혜석은 당시 일본 사회의 진보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해방론과 신여성운동의 영향을 흡수하며 지적 성장과 더불어 글쓰기를 시작한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과 여성 문예동인지 <청탑> 등에 글을 발표하며 여성으로서, 지식인으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 예술가로서 포부를 키우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강요하는 결혼을 거부해 학비가 끊기자, 1915년 초 조선에 돌아와 여주의 공립보통학교 교원 생활로 돈을 마련해 도쿄 유학을 이어간다. 나경석의 소개로 게이오대학생이자 시인이던 최승구와 사랑에 빠진 것도 이 시기다. 1915년 말 아버지의 사망으로 결혼 압력이 사라지지만, 즈음 최승구는 결핵 증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귀국한다.

 

1916년 봄 최승구는 25세로 이른 죽음을 맞는다. 그의 가족들로부터 연락을 받아 찾아간 전남 고흥에서 마지막으로 최승구를 만난 나혜석은 다음날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발작을 일으킬 만큼 충격을 받는다. 예술과 삶이 조화롭게 접목된 생활을 꿈꾸던 나혜석에게 요절한 시인 최승구는 일생 이상화된 연인으로 존재감을 발휘하며 큰 그림자를 남긴다. 1920년 김우영과 결혼한 나혜석은 신혼여행으로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가 비석을 세웠고,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젊은 날 죽어가는 그를 곁에서 보살피는 대신 일본으로 속히 돌아와 학업에 복귀한 자신을 원망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18년 4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나혜석은 잠시 교단에 서기도 하지만 건강 문제로 그림 공부와 글쓰기, 신문 만평 연재 등을 주로 한다. 1919년 1월과 2월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과 “초하룻날”을 주제로 연재한 풍속화풍의 만평들에는 나혜석이 가진 당대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과 예리한 관찰력이 드러난다. 1919년 3월 2일, 나혜석은 일군의 지식인 여성들과 이화학당 기숙사 방에 모여 3.1운동에 여학생들을 참가시킬 계획을 논의하고 자금 모금과 만세운동 확산을 위해 활동한다. 8월 초 일경에게 체포되어 5개월간 수감됐다가 경성지방법원의 ‘면소 및 방면’ 결정으로 출옥한다. 혹독한 감옥 생활은 이후 삶의 고비를 극복하는 자신감의 원천이 된다.

 

이후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나혜석은 1920년 4월 김우영과 결혼한다. 최승구의 죽음 후 이광수와도 잠시 가깝게 지냈지만 이를 반대한 나경석은 조혼한 부인과 사별하고 유학 중인 김우영을 소개했고, 두 사람은 몇 년간 도쿄와 교토를 오가며 교제했었다.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귀국해서 3.1운동으로 수감된 여성들을 변호했던 김우영은 적극적으로 구혼했고, 나혜석은 세 가지 약속을 내걸고 결혼을 받아들였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케 하여주시오.” 

 

나혜석의 결혼은 현실적 한계에 떠밀린 선택의 측면도 컸다. 조혼 관습과 신식 사조가 혼재된 시대의 신여성들에게 사랑하는 상대와의 결혼이나 경제적 자립은 거의 불가능했고, 1919년 어머니가 죽고 혼자된 나혜석에게 가족들의 결혼 압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을 거라고 저자는 부연한다. 결혼 얼마 후 찾아온 임신은 또 다른 질곡이 되지만, 출산 후의 부자유스러운 상황을 예상한 나혜석은 임신 기간 중 두 달간 도쿄로 건너가 그림 공부에 매진하고 돌아와 전시회를 연다. 1921년 7월 첫딸을 출산하고 몇 달 후에는 만주 안동현의 부영사로 발령받은 김우영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다.

 

6년간의 만주 생활은 나혜석의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생산적인 시기였다. 조선인 최고위 관료인 부영사의 아내로, 첫딸에 이어 두 아들을 출산하며 세 아이의 엄마로 바쁜 중에도 꾸준히 그림을 그려 선전에 입선해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다양한 글을 발표한다. 특히 1923년 1월 <동명>에 발표한 “모된 감상기”는 임신과 출산, 육아 과정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엄마로서의 의무를 홀로 짊어져야 하는 여성의 운명에 대해 솔직히 토로하며 ‘자식이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까지 표현한 도발적인 글이다. 엄마 되기의 고통과 모성 신화의 부조리를 폭로한 글은 남성 논객과의 지면 논쟁으로도 이어졌고, 나혜석은 이후에도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권리와 행복을 강조하는 글을 꾸준히 발표한다.

 

나혜석의 이러한 활동은 개인적 상황과 사회적 지위가 선사하는 여유로움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을 포함한 당대 여성들이 시대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계몽주의적 노력이기도 했다. 가부장적 전통의 불합리함과 차별에서 예외일 수 없었던 여성으로서 또 예술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나혜석은 자유로운 삶을 열망하며 거대한 장벽에 도전한 것이다. 신식 교육과 유학, 최승구와의 연애와 김우영과의 결혼 등 나혜석 인생의 중요한 변곡점마다 친오빠의 강력한 개입과 영향력이 작용했지만,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는 나혜석의 선택과 의지였다.

 

1927년 봄 김우영은 만주 안동현 부영사 임기를 마치고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구미 여행 기회를 얻는다. 부부는 6월 19일 부산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한다. 1년 남짓 유럽에서 지내며 함께 공식 석상에 참여하고 각지를 여행하지만 김우영은 베를린에서 법률을,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10월에는 파리의 조선 유학생 환영회에서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처음 만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연인으로 급진전된다. 유럽에 머무는 1년 여 동안 나혜석은 유럽 곳곳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서양미술사의 원전들을 접하고 여성참정권 운동 경험자에게 영어를 배우며 세계관을 확장한다. 1928년 9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간 부부의 여행은 1929년 3월 12일 부산항 도착으로 마무리된다. 

 

19개월의 구미 여행은 나혜석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단발머리와 양장으로 구태를 벗고 유럽과 미국에서 자유의 공기를 호흡했던 조선 최고의 엘리트는 넷째를 임신한 몸으로 부산 동래 시댁에 닿았다. 김우영은 변호사 개업을 위해 서울에 머물고, 나혜석은 적잖은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면서 네 아이를 양육하며 떠나기 전과도 판이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런 중에도 여행하며 수집한 작품들과 직접 그린 그림들로 전시회를 열고 여러 매체의 인터뷰와 여행담 기고 등 활동에 매진하지만, 최린과의 파리 연애 소문이 퍼지고 김우영과의 관계도 악화된다. 결정적으로 나혜석이 최린에게 보낸 편지가 발각되자, 서울에서 딴살림을 차려 살고 있던 김우영은 이혼을 요구한다.

 

1930년 11월 김우영과 이혼한 나혜석은 다음해 5월 선전에 입선하며 화가로서 다시 주목받고 다양한 기고를 이어간다. 하지만 제전 출품을 위해 집중적으로 그린 작품들 대다수를 화재로 잃는 불운이 닥친다. 재기를 꿈꾸며 1933년 서울 종로에 ‘여자미술학사’를 열지만 ‘불륜과 이혼’으로 사회적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진 나혜석의 전업 작가 홀로서기는 녹록지 않다. 그림 작업을 계속하지만 지지부진한 가운데 자신의 경험을 담은 다양한 글들을 각종 매체에 발표하며 생계를 잇는다. 특히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김우영과의 만남과 결혼, 이혼까지의 과정을 통해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한 글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다. 이어 최린에게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 소송도 제기하지만, 상당 금액을 받고 취하한다. 

 

“이혼 고백장”과 정조 유린 위자료 청구 소송은 당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고, 현재까지도 나혜석의 이미지를 박제하는 사건으로 기능한다. 파리에서 최린과의 연애와 귀국 후 연락은 개인적으로 김우영과의 의를 저버린 일일 수 있지만, 남성의 불륜과 축첩은 당연시되고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정조가 강요되는 현실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온당한 것임에도 인정받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몰락한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옐로우 저널리즘과 대중의 관음증에 의해 비난과 주목의 대상이 되는 시대를 초월한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혜석은 꾸준히 자신의 경험과 행복에의 의지를 담은 수필, 구미 여행 관련한 기록과 몇 편의 소설 등을 발표하지만 화가로서 이전과 같은 명성을 되찾지는 못한다.

 

19개월의 구미 여행 이후 삶의 나락을 경험하며 유일하게 기댈 언덕인 그림에서도 고전하던 나혜석은 파리행을 갈망했지만 이루지 못했다. 부산에서 아이들을 양육하며 뒤늦게 절감한 모성애는 아이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으로 화했다. 첫째 아들이 12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친엄마의 보살핌을 강조하며 재결합의 유언을 남긴 시어머니의 부고에 달려간 부산에서는 김우영에게 수모를 당하고 쫓겨난다. 1937년 겨울 김일엽이 출가한 수덕사를 찾아가 1943년까지 주로 수덕여관에 머물며 여러 곳을 오간다. 그림을 그리며 고암 이응노와 교분을 나누기도 하고, 방학 때마다 찾아왔지만 엄마로부터 외면당한 김일엽의 아들을 친아들처럼 대했다는 기록 등 이 시기의 생활이 당사자인 김태신의 글로 전해진다. 나혜석이 발표한 마지막 글은 1938년 8월 <삼천리>에 실린 “해인사의 풍광”이었다. 

 

40대 중후반의 나혜석은 무너진 심신으로 아이들을 그리워했다. 일제 관료로 승승장구하는 전 남편 김우영의 거처를 따라 대전과 서울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찾아다녔고, 오빠 나경석이 그림에 전력하라고 공주에 집을 얻어줬지만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가 쫓겨난다. 보다 못한 올케가 몰래 청운양로원에 가명으로 의탁했지만 그곳 역시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몇 년 후인 1947년 이화여대 미대 학생이던 박인경이 안양의 경성보육원에서 52세의 나혜석을 만나 자서전 정리를 도왔다는 기록이 알려진 마지막 행적인 듯하다. 1948년 12월 10일 나혜석은 서울 원효로의 시립 자제원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믿음으로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았던 나혜석이 세상을 떠난 날은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날이다.

 

 

저자가 인용한 나혜석의 글들은, 한두 구절의 강렬함으로 전달되는 파괴력에 비해 진중하고 침착한 느낌이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 에고이스트이자 진지한 계몽주의자였던 그의 용감성이 도발적 언행으로만 치부되고, 드라마틱한 인생과 죽음이 후대에도 작품보다 강렬한 이미지로만 남은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그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읽으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여성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주안점을 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는 누구의 삶이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당사자가 가장 오랫동안 크게 천착한 문제가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테니 말이다.

 

한편 얼마 전에 읽은, 같은 시대를 비슷한 세대로서 완전히 다르게 살다간 [장강일기]의 정정화가 떠오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라는 배경과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삶의 행보를 생각하면, 비판적인 평가를 할 만한 지점은 있는 것 같다. 나혜석의 태생적 조건과 엘리트 교육은 부역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제에 협력한 아버지의 재력에 기인한 것이었고, 결혼 이후의 안정적인 생활과 다수의 선전 입선 등 화가로서의 활동 및 세계 여행 등은 일제 고위 관료였던 김우진의 존재와 뗄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3.1운동에 관여해 옥고를 치른 일,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 창간호에 판화를 실은 일, 안동현 부영사 부인으로서 만주의 독립 운동가들을 도왔던 일화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한 나혜석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나혜석이라는 인물만큼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와 지식인 그룹의 다양한 모습이었다. 특히 1910년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로서 일본 유학을 했던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이 1920년대 일제의 문화 통치시기에 사회 진출 기회를 얻은 후 친일로 급선회한 부분에서는, 1980년대 정치 민주화를 이끌었던 386세대가 보수화되고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은 현재의 경향이 겹쳐지는 느낌이었다. 직접 경험한 부조리를 사회와 시대의 모순으로 확장하고 세상을 바꾸려 노력했던 나혜석이, 출신 계급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개인적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지만, 훗날 적극적인 친일 행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김우영과의 이혼 이후 지속된 불운과 사회적 추락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떤 책이든 그렇지만 특별히 관점과 맥락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는 독서였다. 특히 한 인물의 삶을 전반적으로 다루는 글이라면 배경이 되는 시공간과 환경적 조건에 더해, 주변인들의 영향 등을 참고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물론 그런 복합적 고려에도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동시에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 사람들의 삶이 천차만별이듯, 일제강점기라는 거시적 동시성만을 공통분모 삼아 인물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시도가 부를 수 있는 오독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문외한이기도 하고 책에 실렸거나 온라인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림들의 상태도 별로여서, 아쉽지만 그가 가장 애정을 가졌던 그림에 대해서는 큰 인상을 받지 못했다. 책을 읽기 전 조금 부담스러웠던 “인간으로 살고싶다”는 선언 같은 제목은, 시대와 불화하며 고군분투했던 나혜석의 삶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한 마디인 것 같다.   

 


이상경
2000.2.15.제1판제1쇄 2002.4.20.제1판제4쇄, (주)도서출판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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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