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자정이 넘어 귀가한 명주는 거실 바닥에 코를 박은 채 숨이 멎은 엄마를 발견한다. 거두절미하고 엄마의 죽음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속도감 없는 스릴러처럼 전개된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아파트 소독원도, 엄마의 안부를 묻는 마트 사장도, 이따금 집으로 찾아오는 진천할아버지도, 겨울에 돌아가는 에어컨을 의아해하는 옆집 청년도 명주의 긴장감을 높이고 경계심을 고조시킨다. 명주는 죽은 엄마를 미라로 만들었다. 외출했다 돌아와 마주한 예기치 못한 죽음에 황망한 명주를 움직인 것은 엄마의 휴대폰으로 날아든 연금 입금 문자였다.
명주는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했다. 결혼하고는 부유한 시댁과 남편의 횡포에 위자료도 포기하고 이혼하며 딸 은진을 데리고 나왔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은진을 키웠지만, 도를 넘는 일탈과 뻔뻔함으로 엄마를 경악하게 했던 은진은 초라한 집을 떠나 재혼한 아빠에게 돌아갔다. 자동차공장 급식 조리원으로 일하며 화상을 입어 고질적인 발바닥 통증을 얻었고, 입증되지 않는 통증은 일상을 무력화시켰다. 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고시원을 전전하면서 생동성 알바를 눈여겨보기도 했던 명주는 결국 친정 엄마가 혼자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돌아왔다.
끊이지 않는 불운과 불행 속에 돌아온 집에서, 엄마는 치매 진단을 받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이 시작됐다. 때로는 아기처럼 때로는 폭군처럼 변하는 엄마를 아픈 몸으로 돌보면서 명주는 지쳐갔다. 꾸준히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어느 밤 홀로 떠난 엄마에게는 다달이 입금되는 연금이 있었다. 기초연금 307,500원과 유족연금 698,000원을 합친 백만 원 남짓의 돈은, 언제든 미련 없이 세상을 등질 마음이던 명주를 잠시 멈춰 세웠다. 명주의 선택은 사회가 외면한 삶 앞에서 무색해지는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생각하게 한다.
명주의 옆집에는 준성이 산다. 낮에는 뇌졸중 후유증에 알콜성 치매기가 있는 아버지를 돌보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 생계를 감당한다. 난소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와 해외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형의 부재는 준성을 일찍 철들게 했다. 정상에 가까운 인지기능을 다행으로 여기며 아버지를 세심히 챙기는 준성은 물리치료사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중이다. 준성이 매일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 산책하고 운동하는 집 앞 공원에는 혼잣말을 하며 트랙을 도는 여학생, 인근 요양원에서 빠져나와 아무나 붙잡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할머니가 풍경처럼 존재한다.
엄마가 죽은 후 명주는 옆집 청년 준성과 수시로 찾아오는 진천할아버지 등을 통해 미처 몰랐던 엄마의 다른 모습을 만난다. 활달한 성격에 농담을 즐겼던 엄마, 부자만 사는 옆집에 반찬을 나눠주고 김장을 함께했던 엄마, 진천할아버지와 다정한 문자를 주고받고 함께할 제주 여행을 위해 돈을 모았던 엄마 그리고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증평에 땅을 사두었던 엄마. 곁을 떠나 신산한 세월을 보낸 뒤 돌아와 마주한 치매 노인과는 다른 엄마의 모습을, 명주는 타인들 덕분에 뒤늦게나마 조금 알게 된다.
백만 원의 연금은 명주에게 전에 없던 약간의 여유를 선사한다. 생존 이상을 생각해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명주는 대학 졸업반이 된 딸 은진을 떠올리고 선물을 하기로 한다. 아빠에게 돌아간 후 몇 년간 연락이 끊기다시피 했던 딸, 하지만 재회는 유쾌하지 않다. 떠나갈 때와 다름없이 계산적이고 자기만 아는 은진의 출현은 명주에게 새롭고도 지속적인 위기가 된다. 엄마의 사정은 알 바 없이 돈이 필요할 때만 집요하게 연락하고 찾아오는 은진의 존재는 재앙에 가깝다.
소설은 701호와 702호에 이웃해 사는 명주와 준성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고립과 빈곤 속에서 홀로 간병하는 이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천형처럼 부여된 혼자만의 간병은 나날이 심신을 갉아먹지만, 간병에만 매달리기에도 버거운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생계 활동이 필요하다. 병든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함께 환자로 만드는 가난과 간병의 이중고는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지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굴레다.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나선 길에는 낭패와 불운이 기다리고, 사회안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데면데면한 이웃에서 서서히 안면을 트게 된 명주와 준성은, 가족으로부터 받은 고통의 무게를 공감대로 조금씩 가까워진다. 준성의 아버지가 돌발 상황으로 사망하자 명주는 홀로 전전긍긍했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이 먼저 경험한 각자도생 사회의 끝없는 비참을 준성이 겪지 않기를 바라는 명주의 고백과 제안은 핍진하다. 소설은 두 사람이 증평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혼잣말하는 여학생과 보따리 할머니 그리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등장시키며 마지막까지 불안한 반전을 우려하게 만든다. 하지만 준성에게 ‘운수가 좋은 날’이기를 바라는 맺는 문장을 통해 독자를 공범으로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예전에 책 관련 팟캐스트에서 잠시지만 인상적으로 언급하는 걸 들었는데, 책 모임 10월의 책으로 정해져서 읽게 됐다. 9월의 책은 선정한 나조차도 그저 그랬었는데, 이번 책은 무거운 소재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독자를 시험하듯 시작부터 대담한 사건을 툭 던져놓고 담담하게 이어가는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다. 소설 초반 명주가 찾아보는 뉴스들처럼, 비극이나 패륜으로 소비된 기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사연들이 이랬을까 싶기도 했고 말이다.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나 표현을 거의 만나지 못한 덕에 ‘문학성’이란 무엇일까 라는 주제 넘는 독후감도 남았지만, 그건 내 몫이니까.
책 말미 몇 쪽에 걸친 ‘추천의 말’ 중 첫 글부터 ‘작가의 말’까지, 새롭지 않다거나 진부하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나 역시 읽으며 두 사람의 주인공에게 주렁주렁 매달린 갖은 고통과 불행이 도식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세상 어딘가에 이런 이들도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면 수긍이 되는 부분이었다. 내가 겪지 않았기에 쉽게 공감하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선택과 삶이지만, 선정적으로 재현되거나 사회적으로 무화되기 십상인 존재들의 이야기라는 점은 중요한 것 같다. 여러 사회 문제가 집약된 소설이지만, 나는 준성 아버지의 한 마디를 이 책의 메시지로 기억하려고 한다. “이것도 한 인생인 거야.”
문미순
2023.4.27.1쇄인쇄 5.9.1쇄발행,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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