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2. 29. 17:17

 

 

19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샬롯, 에밀리, 앤 브론테 세 자매의 글을 발췌해 담은 작은 책이다. 읽은 건 어릴 때 으스스하게 매료됐던 [폭풍의 언덕]뿐이니 이들에게 별 관심이 있는 건 아닌데, [벨기에 에세이]라는 제목에 끌려 선택했다. 본문은 “앤 브론테의 죽음에 대하여”라는 샬럿의 짧은 시를 시작으로 6편의 일기와 11편의 편지를 묶은 “바람 부는 하워스에서” 그리고 12편의 산문이 담긴 “벨기에 에세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나온 글들이 아닌데 서문처럼 읽힌 첫 번째 글을 동생의 죽음에 부치는 시로 넣은 점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망자의 고통이나 남은 자의 비감을 토로하기보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을 담담히 수용하며 하느님께 감사하는 내용도 이채로웠는데, 아버지가 목사였고 종교의 무게가 지금과는 다른 세계였을 테니 그렇겠지만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예기치 않게 시작부터 죽음을 마주하며 그들의 삶이 궁금해 살펴보니 책 말미에 짤막하게 실린 생몰년도는 샬럿 1816~1855, 에밀리 1818~1848, 앤 1820~1849. 세 자매가 모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시대를 감안해도 너무 짧은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에밀리와 앤이 함께 썼다는 일기 부분에는 자매들이 자란 하워스 목사관에서의 소소한 일상, 가족과 주변인의 소식 등이 담겨 있고 일기의 원본과 배경이 된 공간의 사진 몇 장이 실려 있다. 자매들은 오랫동안 함께 구축한 상상의 세계에서 ‘곤달 연대기’ 등의 서사를 진전시키며 글쓰기를 이어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여러 곳에서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훗날 함께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과 포부를 키워나갔다. 누군가의 생일이면 과거에 함께 쓴 일기를 열어보고 지나온 날들과 몇 년 후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 자매들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일기는 1845년 7월 30일, 에밀리의 생일 다음 날의 기록이다. 어릴 적부터 공유한 상상의 세계와 미래의 꿈을 여전히 기억하면서 1848년 7월 30일의 삶을 궁금해 하며 자신들의 나이를 가늠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편지 부분에 실린 11편 중 7편의 수신인이 샬럿과 평생 5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친구 앨런 너시, 3편이 에밀리, 1편이 아버지다. 현재 세 편만 확인된다는 설명과 함께 실린 에밀리의 편지들은 모두 샬럿의 여행 일정과 귀가 등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안부를 담아 앨런에게 쓴 것이다. 샬럿이 아빠와 에밀리 그리고 앨런에게 쓴 편지들에는 비교적 세부적인 사실들이 담겨 있는데 그 수가 적은 데다 작성일이 뒤죽박죽이어서 맥락적 이해는 어려웠다. 1841년 4월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에서 원하는 직장을 얻을 방법이 없어 뉴질랜드 북부의 섬으로 이민을 떠나기로 한 지인 메리의 이야기를 하며, 그에 대해 ‘이성적인 기획력인지 절대적인 광기’인지 염려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1848년의 마지막 두 편지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에밀리와 죽음의 소식이 담겨 있다. 일기에서도 느껴졌던 자매들의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데, 생에 대한 적극성의 원동력이 신앙심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벨기에 에세이” 부분에 실린 글은 에밀리와 샬럿이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1842년에 9개월간 벨기에 브뤼셀의 에제 기숙학교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쓴 것으로, 프랑스어로 쓴 과제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샬럿은 과제를 봐주던 에제 선생을 짝사랑했고 이후 소설 [빌레트]에 그 경험이 담겼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제목만으로 19세기 여성들의 벨기에 여행기 같은 걸 기대했던 터라 살짝 당황했지만, 전반부의 일기와 편지가 구성이나 내용의 완결성보다 사료로서의 가치와 무게를 갖는 글처럼 느껴져 아쉬웠던 점을 상쇄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첫 번째 글 “한 인도인 과부의 희생”은 죽은 남편을 따라 불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는 아내와 그 의식을 목격한 기록이었다. 샬럿이 인도에 갔다는 정보는 없으니 이주한 인도인들의 현장을 벨기에에서 목격한 것 같은데, 내용 자체의 충격파에 어지럽게 혼재된 세계와 인식의 이질성이 크게 다가오는 글이었다. 의아했던 한 가지는, 과부는 스물 셋, 넷 정도로 보인다고 하고서 그 옆에 ‘열 여섯 살’ 난 딸이라고 쓴 부분이었는데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차여서 몰입해서 읽다가 의구심이 증폭했다. 원문의 오기라면 달렸을 주석이 없어 편집 과정의 오타인가 보다 싶은데, 이런 부분은 많이 아쉽다.  

이후 에밀리의 “고양이”, “해럴드의 초상, 헤이스팅스 전투 전날”, “어머니에게”, “자식의 사랑”, “형제가 형제에게”, “나비”, “죽음의 궁전” 그리고 샬럿의 “앤 에스큐-샤토브리앙의 「순교자들」”, “애벌레”, “죽음의 궁전”, “가난한 화가가 고귀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가 뒤섞여 실려 있다. 대체로 두 사람의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 인간에 대한 양가적 인식, 독실한 신앙을 전제로 한 세계에의 사유가 녹아 있는 글들이다. “나비”, “애벌레”와 두 편의 “죽음의 궁전”은 같은 글감으로 각각 쓴 글이었는데 신과 자연의 위대함과 유한한 인간의 타락과 비극에 대한 표현들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죽음의 궁전”은 감정과 현상을 의인화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로 구조화한 상상력과 묘사가 감탄스러웠고, 모티프가 되었을 원전이 궁금해졌다. 화가 초년생 조지 하워드가 밀로드 남작에게 후원을 요청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미래의 성취를 소망하는 마지막 글에서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이 어느 정도 드러나 흥미로웠고 예술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샬럿의 간절한 바람이 투사된 느낌이었다.  

책 전반에 걸친 세심한 주석과 설명, 많지는 않지만 적절히 들어간 자료와 사진들, 영어와 프랑스어 번역자의 ‘옮긴이의 말’에 출판사의 ‘편집 후기’까지 모두가 무척 애써서 만든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과문한 독자로서 원작 언어에 따른 번역 글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었고, 구성과 편집에 들인 출판사의 노고를 책 말미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브론테 자매와 그들의 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독자라면 무척 반가운 책이 될 것 같다. 초심자로서는 여성의 입지와 활동에 대한 제약이 당연하던 시대의 한계를 별로 느낄 수 없을 만큼 경계 없는 사유와 일상적인 글쓰기와 꾸준한 배움의 길을 걸었던 브론테 자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어 좋았다. 너무 짧은 생애로 다 펼치지 못한 탁월한 재능과 진취적인 미래 계획은 안타깝지만, 남겨진 흔적은 충분히 소중한 것 같다.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김자영, 이수진 옮김
2023.8.25초판1쇄 발행, 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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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