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4. 3. 5. 02:50

 

 

참으로 좋아해서 여전히 가끔씩 떠올리며 살아가는데 책의 존재를 얼마 전에야 알게 됐다. 저자가 ‘거스 반 세인트’로 되어 있으니 그에게도 외래어 표기 기준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구스 반 산트로 굳어진 이름과 동명 같지 않기도 하고 검색으로 찾기도 어려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오래 전 책이라 아무런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가운데 무려 도서관 보존서고에 묻힌 책를 상호대차로 대출할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에서 모티프를 따고 또 어디선가에서 영감을 얻은 약간 옴니버스 같은 기획이었다고(아닐지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서 내심 영화 자체에 대한 감독의 의도와 각본에 대한 이야기, 제작노트 기록 같은 걸 기대했는데 몹시 번지수가 다른 책이었다. 그런 장르가 있다면 영화소설 혹은 영상소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물의 대사와 감정,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쓴 듯한 책이었다.  

단, 영화에서 대사나 내레이션으로 나오지 않았던 전지적 시점의 설명이 꽤 많이 덧붙여져 있는데, 원작에도 있는 것인지 모두 역자의 재량 서술인지 궁금하다. 인물들의 내면이 어떤 부분에서는 과하게 느껴질 만큼 상세하게 묘사되어 때로 거슬리기도 했지만 덕분에 오롯한 존재감의 마이크와 스코트만이 아니라 거리의 부랑 청소년들과 그들의 문화 전반이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1992년에 출간된 책이다 보니, 영화의 톤과 별개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텍스트에도 반영되어 있는 점은 묘한 느낌을 주었지만 말이다. 

이십 여 년 동안 영화를 예닐곱 번은 본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본 지 몇 년이 지났는데 활자의 묘사와 함께 머릿속에 영화의 장면들이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게 신기했다. ‘사실’보다 이미지가 더 강력하게 기억되기 때문인지, 영화 내용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읽으며 새롭게 느껴졌던 것 역시 신기한 경험. 스스로를 줄거리전제감상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이미지나 소회보다 서사의 기억이 쉽게 휘발되는 경험이 누적되면서 무의식적 강박이 생겨난 걸까 싶어지기도 했다.  

영화 포스터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마이크와 스코트의 오토바이 장면이다 보니 그들이 이복형의 집으로, 패밀리 트리 인 호텔로 엄마를 찾으러 떠날 때 타는 오토바이가 모두 훔친 것이었다는 것이 미처 몰랐던 중요한 사실로 느껴졌다. 전혀 염두에 없었는데 밥과 부랑아들이 몹시도 일자리와 안정된 일상을 원한다는 점도 새로웠다. 마이크의 엄마를 찾아간 로마에서,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나 스코트의 사랑을 차지한 카르멜라의 존재와 극적 배치도 의미심장하고 인상적이었다. 그 새로운 사랑은 마이크에게 엄마와 스코트, 이중의 상실을 동시에 안겨주는 것이어서 더욱.  

전체적으로는 과연 이 책을 구스 반 산트가 쓴 그대로 번역가가 옮긴 것일까 하는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고, 본문 외에는 역자의 말이라든가 부가 설명이 전혀 없어 알 수 없었지만 대체로 기꺼운 마음으로 읽었다. 디테일의 측면에서 새롭게 느껴졌던 부분들이 많았기에, 대조할 역량이나 필요는 없지만 책의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누렇게 바랜 책장과 아날로그 시절의 도서 관리 흔적들도 한 몫을 한 여러 모로 진한 향수의 독서였다.

 

어렸을 적만큼은 아니지만 갖은 결핍으로 외롭고 외로운 마이크를 읽으며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려서, 역시 나의 인생 영화는 [My Own Private Idaho]이며 성도 모르는 Mike는 인생 캐릭터라는 걸 확인했다. 또한 그가 미카엘이라는 것도 새삼. 마이크도 미카엘도 모두 리버 피닉스였기에 그 이른 죽음이 남긴 전복성과 충격 때문에 강렬하게 각인된 것이지만, 그의 시절과 나의 시절이 교차한 그 시기로부터 오래 이어지는 마음이 나는 고맙다. 그 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다호에 한 번은 가보고 싶다.    



거스 반 세인트•옮긴 이 한명준
1992.2.15초판인쇄 2.20초판발행, 도서출판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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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