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아니지만 어렸을 적에 난 밥을 정말 싫어했었다. 엄마는 직장에 나가고 오빠랑 나를 돌봐주신 친할머니는 뇌구조의 구할 쯤이 남존여비로 채워진 분이셨던 덕에 내가 밥을 먹든 말든 별 간섭을 안 해주셨다. 사춘기 때는 먹는다는 것 자체가 주는 동물적인 느낌에 대한 거부감과 공복감의 황홀이 장난 아니어서 밥 먹듯이 굶으며 지냈었다. 고딩 때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영양실조란 말을 듣고 엄마한테 엄청나게 욕을 먹으면서도 내심 흐뭇했었던 기억. 대략 입 짧은 아이로 한참을 살다가 밥심,이란 걸 온몸으로 느낀 게 서른 즈음이었다. 문해교육단체에서 일하며 평일 오전엔 늘 수업이 있었는데, 빈속에 두 시간을 떠들고 나서 몰려오는 허기를 달래주는 밥이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고작 밥 한 끼에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은 딴엔 무척 자존심 상하는 것이었지만... 하는 게 없으니 배도 안 고팠구나, 이런저런 이유로 밥을 저주하며 지냈던 지난 삼십 년을 돌이켜 보며 무참히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밥심은 이제 나 역시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일상의 동력이다.
열 두 명의 동지들이, 그 밥을 끊은 지 일주일이 더 지났다. 아주 가끔 한나절이나 1박 2일 투쟁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피곤에 절은 몸은 관절마다 쑤셔오고 열 시간 쯤은 자줘야 그나마 다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길바닥을 집 삼아 일터 삼아 몇 년을 살아 온 동지들의 몸은 대체 어떤 상태일까 혼자 생각한다. 지금이야 싸움의 한복판에서 긴장한 채 지내니 버텨지는 것일 테지만, 언젠가 싸움이 마무리된 후에 온전하게 건강을 회복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그렇게 싸워 온 사람들이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일주일을 넘게 보냈고, 앞으로 얼마를 더 굶어야 할 지도 당장은 기약이 없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누구나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나 역시, 마음이 참 그렇다.
쌍차 동지들의 집단단식 소식을 들으며, 나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겨우 국정조사 따위를 위해 온갖 투쟁을 불사하고도 다시 집단단식을 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힘없는 냉소는 비겁함일 뿐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참으로 답답하더라. 단식이나 고공농성 같은 자해적 방식은, 힘없는 자들이 집단적으로 세력화될 수 있을 때는 선택하지 않는 투쟁일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합리적 방식으로, 시스템 속에서 정연하게, 법치와 질서에 어긋남 없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때 그러나 멈출 수 없을 때... 모두가 물리적으로는 한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 결국 제 몸을 볼모로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실은 이미 스물 네 사람이 유언도 없이 택한 죽음으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법이며 정치가, 권력이며 언론이, 방치하고 외면하고 왜곡한 사태의 진실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변한 건 별로 없으니 회계조작 정리해고를 풀어헤치기 위해 가는 길 위에는, 숱한 죽음을 딛고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원초적인 몸부림들만이 가득하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곡기를 끊어 진실을 찾으려는 투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예전에 읽었던 카프카의 '단식광대'가 떠올랐다. 한 세기쯤 전에 나온, 흥행주와 계약을 맺고서 갈채를 보내는 대중들을 앞에 두고 외롭지만 자랑스레 단식을 이어가는 광대의 이야기. 볼거리가 별로 없었을 그 시절, 단식광대는 도시와 농촌을 순회하며 '상연'할 만큼 남녀노소 모두가 환호하는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단식이라는 남다른 기예를 보유한 자존감 높은 광대 그리고 엄격한 의전과 철저한 제한을 통해 관객의 관심과 열광을 고조시키려는 흥행주. 하지만 물론 단식광대의 존재감은 관객들의 반응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예술이 되기엔 다른 장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보여줄 게 없고 별로 미학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우리에 가둬진 채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단식을 밥 먹듯이 하는 광대의 사활을 건 공연, 그야말로 시위. 들려주든 보여주든 대체로 행위를 전제로 하는 예술과 먹지 않음이라는 반-행위와 그로 인한 변화들은, 언제나 좀 더 자극적인 볼거리를 원하는 대중들의 조바심을 채워주기엔 한계가 자명하다. 물론 오늘 대한문에서 곡기를 끊고 있는 동지들을 단식광대와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 허나, 다르다면 또 무엇이 다를까. 단식광대에게 단식은 존재의 재현방식이자 목적이었다, 투쟁하는 동지들에게 단식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렵다.
함께 밥 먹으며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다. 고작 하루지만, 함께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망할 놈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