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6. 5. 10:47



'화가 전혁림에게 띄우는 아들의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전혁림 화가 탄생 100주년에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아버지처럼 화가이자 2003년 전혁림미술관을 짓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는 전영근 관장, "언젠가는 넘어서야 할 스승, 화가 전혁림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짧고 굵은 헌정사로 시작되는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크게 두 부분 '스승 전혁림에게 보내는 아들의 그림 편지'와 '화가 전영근의 미술관 그림 산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에는 아버지와의 추억담과 가족의 일화, 어린 시절부터 장성한 후까지 곁에서 지켜본 화가 전혁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영근 화가의 그림들과 함께 실려 있다. 예술에 몰두하는 화가의 일상과 가족들의 삶의 이야기도 좋았지만, 행간에 묻어나는 과거의 생활상과 이제는 찾아볼 수 없는 통영의 지난 시절을 엿볼 수 있는 점도 의외로 흥미로웠다. 1962년 부산문화상의 부상으로 받은 금성라디오를 갖고 집에 돌아왔지만 집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친구의 병원에 팔았다는 이야기, 여름방학이면 어머니와 함께 부산에 가 일주일 정도 지내던 아버지의 작업실에 처음으로 홀로 찾아간 10살 아들의 기억 속 통영의 항구와 배안의 풍경 그리고 여관 작업실에서의 일화들, 복도 끝방에 살며 간식을 챙겨주고 놀아주던 애리 누나와의 마지막 만남과 "누나가 쥐어준 동전은 누나와 헤어져 서글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탕에 간식을 사 먹느라 펑펑 다 쓰고 말았다."(25쪽)는 귀여운 고백.

 

오랜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낙심해 통영으로 돌아온 전혁림 화가는 1979년 <계간미술>의 재평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 유명화랑에서 내려온 이의 주문서와 지폐 뭉치들이 희망으로 다가왔고 한 달 동안 수십 점의 그림을 완성해 아버지가 서울에 가시자, "어머니는 앞으로 걸려올 연락을 대비하여 전화국에 전화 신청을 하고 왔다"는 부분이 뭉클하고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2003년 살고 있던 집을 헐고 그 자리에 지금의 전혁림미술관을 짓는다. 30대 초반 프랑스에서 인상적으로 느꼈던 니스의 샤갈 미술관을 떠올리며 아버지의 그림으로 디자인한 타일 7,500장으로 외벽을 장식했고,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위해 석 달 만에 완공했다고 한다. 전혁림미술관과 기념품샵과 카페는 저자의 가족들이 운영하는데, 계산대에서 마주치거나 지나치며 나만 알아보던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접하는 것도 이채로웠다. 일흔이 넘어 만난 손주들을 애지중지 사랑하고 자랑했던 화가가 물감 범벅의 작업복에 깨끗한 포대기로 손주를 업고 먼 동네까지 산책 갔다가 "누군가 이상한 할배가 아이를 업고 있다고 신고를 해서 출동한 경찰에게 검문을 받으신 적도 있다."(54쪽)고. 그런 손주들이 미술관 운영에 손을 보태며 하늘나라의 할아버지와 함께 호흡한다니, 복 받은 가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통영국제트리엔날레 이후 다시 찾아간 미술관 3층에서는 볼 수 없었지만, 예전에 본 작품 중 기억에 많이 남았던 것이 나비 문양이 그려진 하얀 베개 그림이었다. 책에는 "예술가의 아내, 마지막 가는 길" 부분에 자리해 있고, 당시 작품 설명에도 비슷한 내용이 써있었던 것 같다. 전혁림 화가는 해방 직후 김춘수, 유치환, 윤이상 선생 등 고향의 문화예술인들과 결성한 '통영문화협회' 활동을 함께했던 문화운동가 정명윤의 소개로 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아내는 "특이하고도 불 같은 성정"(58쪽)에 예술가의 자유로움으로 미술교사로 발령을 받아 부임해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오곤 하던 남편으로 인한 생활고와 시댁 가족들의 뒷바라지 등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훗날에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세월이 흐르며 마음 깊이 존중하게 되었다고"(59쪽) 한다. 19세에 13살 연상의 남편과 결혼해 80세에 먼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절절한 마음이, 한 장의 그림에 더해진 사려 깊은 이야기들로 더 진하게 다가왔다.

 

두 번째 장은 전혁림미술관이 소장한 대표작들에 대한 전영근 관장의 해설, '화가로 성장한 아들의 눈에 비친 화가 전혁림의 작품'이다. 1950년대 순수 추상 작품부터 1960년대 부산의 대한도자기주식회사 연구실 시절 도자 작품, 1980년대의 민화를 재해석한 작품, 1990년대의 색면추상 작품, 2000년대의 대형 작품들과 다양한 석판화 작품에 대한 저자의 상세한 해설이 실려 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쉽게 쓰여 있고, 한 번쯤은 미술관에서 본 그림들이기도 해서 해설을 읽으니 조금은 친숙한 느낌이 배가되었다. 여행자 시절부터 몇 년에 걸쳐 열 번도 넘게 가봤지만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충렬사"나 "운하교", "충무항" 정도 말고는 사실 잘 모르겠기도 하고 언제든 갈 수 있으니 건성으로 지나치기도 했었는데, 나중에 갈 때는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 새롭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몇 년 전 봄날의책방에서 샀는데 얇은 책이니 마음이 동할 때 금세 읽겠거니 하고 책장에 묵혀뒀었다. 어제 도서관 강의에서 전혁림미술관에 갔고, 삼십 분 남짓 전영근 관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은 후 생각이 나서 꺼내 읽었다. 몇 년 전 여행에서 평일에 혼자 갔다가 마침 3층에서 그가 그림을 설명하며 인터뷰 중이어서 조용히 엿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따로 시간을 내주신 거였고 그리 길지 않았음에도 새삼스레 와닿는 바가 많았다. 잠깐의 이야기와 얇은 책이지만 말도 글도 정제되고 적당한 밀도와 온도를 갖춘 느낌이어서 더욱 관심과 호감을 느꼈던 것 같다. 대화가의 아들이자 같은 길을 걷는 화가로서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에필로그에서 모르는 중에 괜히 좀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 가까이 있어 소중함을 모르고 있었던 존재들을 새로 만난 느낌이다. 

 

 

글과 그림 전영근
2015.12.10초판1쇄 2018.4.30.2쇄, 남해의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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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