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13






무척 마음에 들기도 하고 한편 무척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해서, 이래저래 끄적이다가 관뒀었는데... 딱 88년도에 가수왕 먹게 생겨먹은 최곤의 '비와 당신'을 반복해서 듣다보니 영화 본 얘기를 하고 싶어졌다. 장안의 화제까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잔잔하게 향수를 자극하며 회자되고 있는 '라디오 스타'. 서울까지 걸음해 보았던 '내 청춘에게 고함'이 영화라기보다 잊고 지냈던 지나 온 날들의 편린을 만난 것 같았던 탓인지 오랜만에 영화를 본 느낌이기는 했다. 하지만 어딘가 많이 빈 듯한 헐렁함. 거의 모든 것이 최적이었던 '천하장사 마돈나' 덕에 고무된 마음이 개연성 없는 기대를 배가한 것도 까닭이 될지 모르겠다.
 

실은 며칠 전에 읽은 이준익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 눈치를 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무척이나 조건순응적인 인간이라고 순순히 인정하는 감독의 영화, 예술보다 노동이 더 신선하다고 생각한단 그의 말은 감동적이었지만 성실과 정직으로 만족하기에는 세상에 이미 영화는 너무 많고 세련되어버렸다. 게다가 나는 투톱으로 나선 것만으로도 예우적 화제에 오르는 안성기와 박중훈에게 연기로써 매료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하여 영화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88년, 물론 왕년의 가수왕 최곤의 dj 생활은 현재적이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88년의 정서' 쯤에 안이하게 내려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적당한 촌스러움과 적당한 편안함, 세상이 이렇게까지 영리하게 돌아가기 전의 맘 놓은 순진함 같은 것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는 '라디오'를 이야기했기 때문이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어디선가 마주친 가십성 기사, '긴급조치 19호'를 만회한다는 둥 하며 아저씨의 깜짝 출연을 알리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되면서, 미사리 어디쯤 될까 싶은 까페에서 닳고 닳은 느낌으로 수천 번은 불렀을 노래를 부르는 최곤에 비릿하게 열광하는 손님의 과장된 반응을 보며 참 난감해졌다. 이십 년쯤 전에는 환히 빛났을지 모를 미사리니 양수리니 하는 라이브 까페를 먹여살리는 그녀들, 결국 산업으로써의 '7080'을 부활시킨 시대착오적 향수의 건설자들을 보며... 아, 아직은 동감하고 싶지 않다는 나 역시 속물스러운 저항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역시 인간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내 추억은 아직 그렇게 잡되지 않단 말이지! 라고 나는 강변하고 싶었던 걸까.
 

정상에 올랐던 88년의 자의식에 붙박혀 일상을 난장으로 지속하는 최곤과 가수왕의 가오를 a/s하듯 별 일정도 없는 매니지먼트에 사력을 다하는 박민수. 철 없는 아들과 그렇게 키워버려 책임지지 않을 수 없는 엄마 같기도 하고, 나이 먹어 정신 못 차린 청년과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연인 같기도 한 그들의 관계 자체가 차라리 향수 어린 것이었다. 이해 앞에서는 부모나 친구를 배반하는 일도 심심찮게 되어버린 세상에서, 그들은 과히 순수한 존재들도 아닌 주제에 질곡의 동고동락을 일삼는다. 가능성과 희망이 아니라 함께 한 세월과 몸에 배인 습관이 만든 깊은 정을 어렵사리 떼는 계기는, 눈물을 머금고 상대방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마치 지난 세기 마지막 인정의 관계를 증거하듯, 그들은 나름 의리 하나는 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물론 꽤나 도식적인 인물들이었지만,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윤주상과 정규수, 정석용, 조련 등의 안정된 연기와 존재 자체가 정신없음인 노브레인의 연기인지 생활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도 톡톡히 활력을 불어넣었다. 스치듯 묻어갔지만 최곤을 따르는 이스트리버 밴드의 '애비로드' 오마쥬는, 거의 한치도 어긋남 없이 전형성 속에 안주한 영화에서 유쾌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드문 장면이었던 것 같다. 일대일의 청취를 넘어 면대면의 라디오를 만드는 주인공들인 다방아가씨, 중국집 배달원, 철물점 주인 심지어 고스톱판의 중재를 맡기는 할머니들과 사랑의 메신저를 자처하는 불특정다수까지. 의도했건 아니건 이건 영화거든, 말을 건네듯 소격의 압박을 전하는 에피소드들이 즐비하고 한편 이런 어이없는 착함이 영화의 미덕으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듯도 하다.(그래서 너무나 아쉬웠다...--;;)  
 

그리고 좀은 뜬금없지만, 배경이 된 영월이라는 소도시. 자타가 공인하는 전락의 포지션이지만, 좌충우돌의 와중에서도 공동체를 구성한 개인들의 삶결에 활기를 불어넣는 dj의 주술적인 힘이랄까. 어쩌면 변화의 관건은 규모의 문제라는 전제하에, 전파를 장악하는 선한(?) 힘과 어떤 꼬뮨의 가능성 같은 게 잠시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그러나, 어쩌면 이제 변방은 변방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결국 그 착한 영화 역시 고백하고 말지만 말이다. 끊임없이 내부를 확장하는 자극들에 의해, 또한 내부로 남아있지 않으려는 운동에 의해 결국, '최곤의 오후의 희망곡' 역시 추억으로 남겨질 때 아름다울 수 있을 뿐.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싶어졌다. 
 

사실 영화와 관련해 내게 가장 인상적인 건 최곤을 가수왕으로 만들어준 히트곡 '비와 당신'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담당한 방준석. 90년대 중반 가장 잘 나가는 프로듀서였던 송홍섭의 극진한 지원 속에서 꽤나 화려하게(?) 데뷔했던 '유앤미블루', 그때까지 그런 프로가 계속됐던가 의아하지만 여튼 매우 이례적으로 '신인간시대'에 나왔던 걸 봤었고 학전에서 신윤철과 함께 한 공연도 즐겁게 봤었다. 두 장의 음반을 내고 갈라선 그들 중 방준석은 때론 '이인'이라는 이름으로 어어부의 음반과 공연에 참여하며 영화 음악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이승렬은 몇 해 전 반가운 독집 음반을 냈었다. 그야말로 88년스러운 빛 바랜 통속성으로 점철된 락발라드 '비와 당신'을 들으며, 향수 자체를 주조해내는 그의 능력에 솔직히 놀랐다. 언더그라운드의 끝물에서부터 인디씬의 중심을 거쳐 이제는 의심할 바 없이 실력있는 뮤지션으로 자리를 잡기는 했지만... 외곬이라 믿으며 응원하던 놈이 실은 만능임을 알아버렸을 때의 기특한 배신감 같은 것? 암튼, 방준석 화이팅이다.
 

아무려나, 영화는 지난 시절 내게 노래를 들려줬던 여럿의 얼굴을 겹쳐 떠오르게 했다. 세월이 흐른만큼 수많은 왕년의 스타들이 명멸했기 때문일 테고, 그리고 실은 단 한 번 빛나지 못했던 젊음조차도 이제는 공평하게 시들고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중학교 시절의 몇 달 밤을 함께 했던 kbs fm의 '박중훈의 인기가요'와 '내 사랑 동키호테'에서 상큼하게 삽입곡을 불렀던 그 박중훈의 기억, 그리고 그 시절에 들었던 노래와 가수들의 추억이 자꾸만 떠올라서... 며칠을 곱씹는 동안 영화에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린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중에 화려했던 과거에서 발을 빼지 못한 채 자존심만 남은 천덕꾸러기 최곤의 고백 한 마디가 자꾸만 떠오른다. '다시 노래하고 싶어질까봐',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기진실이 허튼 욕망이 되기는 얼마나 쉬운가. 그리고 몇 장면에서 '의미심장하게' 나타난 아저씨, 결국 살아가는 일은 각자의 자족선을 조정하고 세상과 맞춰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하물며 영화 하나에도 이렇게나 아쉬움과 할 말이 많은데, 삶은 말 할 것도 없겠거니.




2006-10-07 22:51,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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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