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11. 6. 20. 01:26







해 떨어진 뒤의 필름포럼은 언제나 충분히 스산하다. 옥상 난간에 다가서면 시선이 닿는 곳에는 하늘을 조각낸 반짝이는 마천루들이, 고개를 떨구면 퇴락한 악기점과 텅 빈 짐칸을 허옇게 드러낸 쓸쓸한 용달이 즐비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꾸역꾸역 모여들어 담배를 피워무는 청춘들 속에 잠시 섞여있자면, 어쩐지 내남없이 휘황한 서울의 찌끄러기들만 같아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이상한 친밀감이 번지기도 하는 곳. 그리고 어쩌면 거기 낙원에서는 무척이나 어울리는 영화들을 줄창 틀어댄다.  
 

한 청년이 있다. 시골 보육원 출신의 갈 곳 없는 천애고아. 물놀이하던 친구의 반짝거리는 등허리가 눈부셨던, 물가의 추억을 뒤로 하고 서울로 상경한 청년의 이름은 수민. 부빌 언덕이라고는 가족뿐인 철옹성의 자본주의 이성애 질서 속에 던져진, 가족도 돈도 없고 심지어 동성애자인 해사한 스무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한눈에 봐도 '재수 없는', 번듯하나 소심한 또 한 청년이 있다. 빽 좋고 교양 있고 허세 가득한 부모 밑에서 좋은 차에 많은 돈 남 부럽잖은 낙하산까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동성애자인 그의 이름은 재민.
 

퀴어-멜로라는 아직은 극단의 수용성을 보이는 두 이름을 나란히 걸치고 있는 영화는 새롭고도 뻔했다. 극장 개봉을 거친 영화 중에서는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또한 당당(혹은 담담)하게 동성애를 그려내고 있지만, 갈등의 골간을 이루는 가족, 계급, 감정, 이성애 혹은 동성애라는 맥락 위에서 이야기는 사정없이 통속적이고 진부하며 한편 톤을 달리하는 후반부는 좀 당황스럽고 이물감이 느껴졌다. 이성애자 수북한 세상에서 연애의 현장을 목도하는 일은 그야말로 다반사, 그러나 동성애자를 아무리 친숙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해도 그 내밀한 현장을 시퍼렇게 눈 뜨고 구경할 길은 없었던 탓일까. 주인공 청년을 이성애적인 관계로 치환한다면 그렇고 그런 삼류멜로쯤에서 그치고 말았을지 모를 이야기가, 어쩌면 그 적나라한 묘사로 인해 빛나는 생동감을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참 이상하지. 현실을 위해 사랑을 버리고 몸을 파는 수민과 사랑을 위해 현실을 뒤로 하고 매달리는 재민이 마침내 연인이 되었을 때 나는 너무 설레었고, 그들이 사랑을 나누며 짓는 웃음이 너무나 싱그럽게 느껴져 온몸이 간질거리기까지 했다. 절묘하게 어긋나는 타이밍과 서로를 가로지르는 단단한 오해의 목격자가 된 나는 스크린에 빤히 비치는 주인공을 향해 마음 속으로 '말해, 말해' 외쳐댔다. 좀은 뜬금없이 '귀향'과 '파고'의 이미지를 불러내며 어수선한 희비극의 기운을 잔뜩 드리운 후반부, 이렇게 끝나면 정말 너무하잖아 안타까운 눈물이 어른거렸고 마침내 해피엔딩에서는 마음이 환해졌다. 
 

그들 사랑이 그리는 좌표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서 나는 계급을 떠올리며 적의를 품고 사랑을 떠올리며 희망을 품는, 아주아주 촌스러운 관객의 역할을 성실히 완수했다. 하염없는 감정이입에 좀 머쓱해져서 머리 속으로 허접스런 핑계같은 감상들을 다 떠올리다보니... 아무리 아닌 척 해도 반 이상은 관음증, 마이너리티를 향한 오리엔탈리즘, 의식적이거나 위선적인 역차별의 옹호. 찔끔찔끔 찔리는 거 인정. 게다가 실은 요즘 며칠, 쨍한 사랑 이야기에 취하고 싶던 참이기도. 뜬금없이 '사랑' 비슷한 게 궁금하기도 하고 그 사랑 때문에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하는 애타는 마음이 땡기기도 하던 차, 잘도 걸렸다. 그래서 보는 내가 그렇게도 애가 달아 어쩔 줄 몰랐던 걸까. 
 

아무려나, 둘러싸거나 가득 채운 모든 것들을 다 응원하고 축복해주고 싶은 영화를 오랜만에 만나버린 것이다. 편파적인 김에 덧붙이자면... 서울을 '싹 다' 돌아다니고 싶다던 가람, 그렇게 바라던 차가 생겼지만 작은 옥탑방에 사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드라이브 한 번 못하고 떠나버린 어린 죽음. 감히 계급모순 씩이나 떠올리게 만든, 그의 영혼이 흩뿌려지던 삭막하고 차가운 서울 거리에 흐르던 음악의 여운. 'Oh, Jesus. Hallelujah...' 정말이지, 그 대목에서 성속의 경계를 가볍게 허물고 하나로 엮어버린 방준석의 목소리는 나를 죽일 셈이었던 게지. 그리고 아무리 뒤져도 사진을 구할 길 없는, 조용한 잔상으로 강렬히 남은 구덩이 속 수민과 재민의 모습. 오늘 참 고마워, 너무 추웠지만 나 역시 후회하지 않아. 'Oh, Jesus. Hallelujah...'




2006-12-28 01:48,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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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