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4. 12. 26. 23:45

 

 

통영에 산 덕분에 팔자에 없다고 생각했던 운전을 했다. 여행으로 오갈 때는 띄엄띄엄하나마 정확했던 버스도착 정보시스템이 팬데믹 이후 망가지고 복구되지 않았다. 긴 배차 간격은 기본값이지만 버스로 목적지를 향할 때 도착 시간을 예측할 수 없는 게 너무 불편했고, 아무것도 없다가 버스터미널 안내판에 갑자기 나타나는 ‘잠시 후 도착’은 반갑기보다 농락당하는 기분을 안겨줬다. 격주로 답사가 있는 도서관 강의를 들으며 반복되는 상황에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외출할 때마다 일상의 무기력을 배가시키는 멍청한 기다림의 스트레스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던 수십 년 장농면허자의 소심함을 이겼다.

 

지인의 도움으로 부산의 중고차 시장에서 경차를 구매한 게 2022년 6월, 탁송으로 받은 차로 10시간 연수를 받았다. 면허를 취득할 때도, 이후 딱 한 번 운전대를 잡았다가 도랑에 차를 박아 견인해야 했을 때도 절감했던 ‘운전과 맞지 않는 나’는 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긴장되는 심신을 이완하기 위해 오랜만에 풍경 아저씨의 노래를 리플레이하며 다닌 통영 시내는 시간이 가면서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운전 연습 겸 쿠폰도 쓸 겸 영화를 보러 cgv거제로 향하는 길은 끝내 편안해지지 않았다. 통영 끝에서 신거제대교를 거쳐 거제 시내로 향하는 10km가량의 무신호 구간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손에 땀이 찼고, 무사히 집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이 자신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운전하면서 알게 된 나는 속도 내는 걸 많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어린이보호구역과 횡단보도 신호등을 반가워했던 초반의 마음은 지금껏 달라지지 않았고, 거제를 오갈 때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70km 속도제한 팻말이었다. 내가 가입한 캐롯자동차보험은 운전을 마치고 나면 정속률을 중심으로 점수와 포인트 적립 안내 알람이 울리는데, “당신의 운전 습관을 따라할래요” “당신의 운전으로 도로가 더 안전해졌어요” 등 호들갑 칭찬 일색이었다. 보험료 할인이 된대서 뒤늦게 사용하기 시작한 티맵의 안전운전 점수는 100점이었는데, 지인에게 들은 바 흔한 일은 아닌 듯했지만 이 역시 운전에 대한 자신감이나 호감을 증진시키지는 못했다. 

 

그나마 좋았던 건 차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과 이따금 지인들이 왔을 때 이동이 용이한 점이었다. 물귀신 체질인지 혼자보다는 누군가 함께일 때 그나마 마음이 편했고, 덕분에 내 기준 장거리인 여수와 부산도 가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운전할 만하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외출하지 않는 날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일주일쯤 운행하지 않으면 방전이 되기도 하는 차는 점점 계륵이 되어 갔다. 차를 사고 몇 달 뒤 부산국제영화제에 다녀온 후 처음 방전을 경험하고 지인의 조언대로 주차할 때는 블랙박스를 꺼놓으면서 나름 신경을 썼지만, 며칠씩 집에만 있다가 방전을 걱정하며 용건 없이 차를 끌고 나가는 일도 적지 않았다.

 

방전 방지용의 하릴없는 운행이지만 통영 운전이 조금 익숙해진 후 날씨가 좋을 때는 통영대교를 건너 옆으로 바다가 펼쳐지는 평인일주로를 달리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을 때 몇 번은 연수 첫날 마음의 준비 없이 들어섰다가 식겁했던 산양일주로를 달리며, 경사와 굴곡에 어느 정도 적응한 스스로를 기특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탈한 완주가 다행스러울 뿐 나는 드라이브를 온전히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긴 일주로가 부담스러울 때는 이순신 공원 초입의 동호항 방파제와 통영국제음악당을 주로 찾았고, 음악당 건물 앞 음표 조형물은 ‘나의 반환점’ 삼아 자주 갔다. 

 

이사할 집의 대중교통 요건이 좋지는 않지만 부산에서의 운전은 내게 불필요하고도 역부족인 일이어서 차를 팔기로 했다. 다행히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가 내일 오기로 했다. 끝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아쉬워서 오후에 마지막 운전을 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면 골치 아픈 일이어서 가까운 통영운하 바닷길과 봉평동을 거쳐 통영국제음악당 ‘나의 반환점’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코스, 비지엠은 너드커넥션이었다. 2년 6개월에 약 7,000km라는 미미한 주행기록을 끝으로 뚜벅이로 돌아간다. 초보운전자에게 안정감과 충만감을 선사해준 여러 뮤지션들 그리고 명정동 충렬카센타에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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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