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일기2024. 11. 1. 21:21

 

 

 

올해 11월 1일은 엄마의 팔순 생신날, 오랫동안 김현식 아저씨 기일로 기억하는 날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부모님 생신을 양력으로 보내기로 하면서 덮어쓰기가 됐다. 칠순이니 팔순에 잔치라는 말이 붙는 건 과거의 일이 되었고, 소소하게 식사 모임으로 대체하게 된 건 우리집도 마찬가지. 추석 때 아빠가 나름의 엄마 팔순 기획을 내놓으면서 당사자 의사와 무관하게 친가 쪽과 한 번, 외가 쪽과 한 번, 두 번의 팔순 식사 모임을 하게 됐지만 말이다. 

 

통영에서 서울까지는 먼 길이라 나는 빠졌던 아빠 주도 모임은 지난 주말, 친가 쪽 사촌 언니 내외들이 대구와 수원에서 올라와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상반기 나의 여행에 자극을 받아 일찌감치 교토 여행을 예약했던 빵 만드는 사촌은 이모 팔순이라고 일본에서 돌아오자마자 작업한 2단 케이크를 올려 보냈다. 아빠의 일방적인 계획에 바쁜 사람들 불러 모은다며 저어했었던 엄마에게도 괜찮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진짜 팔순날인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곳을 예약해 대구와 문경에서 오신 이모와 삼촌, 숙모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어제 저녁 서울에 도착해 동네에서 포장 주문한 전복미역국으로 오늘 아침 식사를 준비했고, 이번에도 사촌은 모임에는 함께하지 못한 고3 조카가 좋아하는 초코케이크를 만들어 보냈다. 이모가 내일부터 친구들이랑 서해안 여행을 가실 거여서 엄빠네서 주무시는 덕에, 점심 식사 후 나는 바로 통영으로 돌아왔다. 

 

어렸을 때는 우리 집만 서울이고 친가와 외가 친척들은 대부분 경상도에 살았다. 방학이면 대구며 울산에 가서 외할머니네, 큰집, 이모네, 삼촌네를 전전하며 놀다 오는 게 큰 낙이었다. 개방적이고 멋진 외할머니네서 또래 외사촌들과 어울려 엄빠 없는 해방감을 만끽하며 신이 났었고, 큰집에 가면 나이 차이 많은 사촌 언니들과 오빠 내외가 조카처럼 챙겨주고 놀아줘서 즐거웠다. 간혹 친척이 우리집에 오면 신발 먼저 숨겨두고 몇 밤 자고 갈 건지 확인할 만큼, 어렸을 적 친척들은 늘 반갑고 정겨운 존재였다.

 

어른이 된 후 통 안 가다 보니 친가 쪽 친척들은 거의 못 보고 엄빠 통해서 소식만 들은 지 꽤 됐다. 큰집 사촌 오빠는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암으로 돌아가셨고 언니들도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다. 어렸을 적엔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당황스럽게 눈물이 나서 참느라 애를 써야 했는데, 반은 인사치레겠지만 지난 모임에 없는 나를 사촌 언니들이 보고 싶어하더란 말을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나고 그때의 마음이 떠올랐다. 이제는 길에서 우연히 지나쳐도 서로 못 알아볼 만큼 소원해졌는데, 흐른 세월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재작년까지 몇 년간 아빠는 고향에 가족 납골묘 만드는 일에 열심이셨다. 가 본 지 너무 오래라 기억도 가물한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를 정비해 가족 납골묘에 모시고 아빠랑 엄마 자리를 만들고, 나보고도 나중에 오고 싶으면 오라고 선심을 쓰셨더랬다. 일 년에 몇 번씩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시젠가 하는 행사까지 챙기며 고향에 가시는 아빠도, 늘 동행하며 ‘집안’의 일로 여기는 엄마도 나는 신기하다. 그분들 덕에 아빠도 엄마도 나도 있는 거고 어렸을 적의 소중한 추억도 남았지만, 조상과 가족을 동일시하는 건 여전히 낯설다. 은연 중 내 세대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을 일이고 사라질 마음이라고 생각해 더 그런 것도 같다. 

 

식사를 마치고 터미널까지 한강변을 걸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에서 멀지 않아 가끔 지나던 길이었는데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곳도 있어 예전 생각이 났다. 서울과 통영을 오가는 마지막 길이라, 야반도주하듯 통영으로 이사하던 날도 떠올랐다.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사는 것도 무겁고 버거운데, 부모 모시고 자식 낳아 키우고 조상 챙기며 살아온 엄빠 세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상은 변하고 알게 모르게 적응하며 많은 게 달라지지만 가족으로부터 연원하는 온기는 분명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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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