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같은바람2022. 4. 7. 17:07



미켈란젤로는 1475년에 태어나 1564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대표적인 작품 "천지창조"("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는 1508년 5월부터 1512년 3월까지 4년에 걸친 작업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재능을 인정 받은 영재로 일찌기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제자로 들어갔고, 15세에는 피렌체 군주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후원하는 전문 미술가 양성소 '산 마르코 정원 학교'에 입학해 조각을 익히기 시작했다고. 20대에 완성한 "피에타"상 "다비드"상의 성공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1503년 즉위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 조각을 의뢰받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천장화 작업을 반강제적으로 맡게 되었다고 한다. 조각가였던 그는 천장화 의뢰를 자신의 실패를 바라는 브라만테(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공사를 담당한 건축가이자 교황 절친)의 음모로 여길 만큼 부당하게 느꼈고 실제로 로마에서 고향 피렌체로 도망쳐 거부하며 버텼으나, 율리우스 2세의 회유와 협박 끝에 소환되어 작업이 성사되었다.

큰 줄거리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이지만 비망록 등 기록에 근거한 미켈란젤로의 삶과 가족의 일화, 로마와 피렌체 등 현재 이탈리아 지역의 관계와 역동, 전쟁이 일상이었던 당대의 시대상과 풍속, 주요 등장 인물들의 관계와 특징, 당대 미술 작업의 과정과 특성, 천장화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과 이후의 보수 과정 등이 매우 자세하고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어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특히 흥미롭게 느껴진 건 신정일치 시대의 관습과 대중의 정서 같은 부분들이었는데, 후대의 시대 구분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고 한 시대가 끝나고 시작된다고 해서 대중과 사회의 삶과 정신이 기계적 단절과 고양으로 이어지지 않는 건 당연하지만, 종교가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중세적 삶이 지속되는 세계의 구체적인 사실들이 흥미로웠다. 역사의 진전이 사회 모든 분야의 균질적인 진보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도덕과 윤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계 지배 세력의 실상과 그럼에도 대중과 사회를 장악한 권위와 힘 역시 놀라웠다.


천장화를 의뢰한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불 같은 성격과 추진력으로 모두의 두려움을 산 인물이었다. 추기경 시절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던 그는 고급 매춘부를 비롯한 여인들 사이에서 세 딸을 두었고, 승진할 때마다 한 밑천씩 챙기며 부를 축적했다. 동료들에 대한 뇌물 공세로 교황에 오른 뒤에는 교회법이 금지한 수염을 기르고 사냥을 즐겼으며, 재위 10년 동안 수 차례 교황령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신성동맹까지 결성하며 직접 전쟁에 나섰던 전사이기도 했다. 말년에는 말라리아에 걸린 것을 비롯해 몇 차례 죽을 고비에서 의사의 권고를 무시한 채 왕성하게 먹고 마시며 극적으로 회복하는 놀라운 생존력을 보이기도 했다. 죽는 날까지 율리우스 2세에게 시달렸던 베네치아 대사가 임종이 다가오자 그를 상대할 필요가 없어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했다는 것이나 스페인 대사가 발렌시아의 정신병원에 쇠사슬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교황보다 덜 미친 편이라고 했다는 부분은 웃기기도 했지만, 오늘날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시 교황들의 비종교적인 실체와 타락상은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그런 율리우스 2세로부터 어거지로 천장화를 맡게 된 미켈란젤로는 교황 앞에서 굽실거리기를 거부한 극소수 인물 중 하나였다고 한다. 4년 동안 자신의 스타일대로 비밀스럽게 천장화를 작업하며 교황이 분노할 때는 도망도 가고 때로는 대들기도 하면서 수 차례의 급료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고. 최악의 권력자인 교황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던 최고의 예술가는, 명예와 인정을 갈구하는 완벽주의자이자 동시대 미술가 그룹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며 자기 비하와 타인에 대한 질시에 빠져드는 인물이기도 했다. 작업은 언제나 심신의 번뇌와 혹사를 동반하는 것이었지만 함께하는 소수의 조수들은 대체로 성에 차지 않았고 불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울증과 자기연민, 귀족 가문의 자손이라는 속물적 확신을 물려준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장인 취급밖에 받지 못하는 미술가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았지만, 가족들은 그의 부양으로 살아가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근심거리를 제공했다. 

율리우스 2세가 독보적이겠지만 이전의 교황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교회는 세속화를 넘어 부패의 온상이었고, 그럼에도 인간의 힘으로 예측하거나 방어할 수 없는 자연재해는 진노한 하느님의 징벌로 간주되어 대중의 정신과 삶을 교회에 귀속시켰다. 이에 더해 당시 사람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환몽과 점성술, 전조와 예언적 지식을 신뢰했다. 특히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사 사보나롤라는 메디치가의 피렌체에서 피어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열광과 예술의 새로운 흐름, 당대의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온 복고주의 열기에 분노한 인물이었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열광하는 악기와 그림, 단테와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책 필사본을 불더미에 던지라는 극단적인 호소와 함께 피렌체의 몰락을 예언했는데, 2년 후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피렌체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규모 침략군을 대홍수에 비유하며 열변을 토하면서 대중을 공포와 비탄에 빠뜨리던 사보나롤라는 1497년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설교와 예언 활동 중단 명령에 불응해 파문되고 다음 해 교수형에 처해졌다. 

타고난 천재적 재능과 치열한 노력으로 작업에 매진하며 긴 삶을 보낸 미켈란젤로의 가장 큰 버팀목은 흔들림 없는 신앙이었던 것 같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부터 사보나롤라를 매우 좋아했으며 수십 년 후에도 그의 음성이 귓전에 생생하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의 진노가 인간 세계에 불과 유황의 천벌로, 홍수로 화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은 미켈란젤로에게도 섬뜩한 의미로 각인됐고, 전반기 작품의 형상화에도 영감을 제공했다고.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의 발흥 자체를 멸망의 전조로 규정했던 사보나롤라의 메시지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시기와 사건은 후대에 명명된 것이지만 말이다. 당시 미술가들이 고급 매춘부들과 곧잘 어울리던 것과 달리 미켈란젤로는 유흥과는 거리가 먼 금욕적인 생활자였고 기력 약화라는 성행위 후유증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는 인물이기도 했다는데, 그의 삶은 끌어간 가치와 신념에는 일관성이 있었던 것 같다.

오로지 작업을 위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인간 미켈란젤로에 대한 묘사나 수사는 대체로 부정적인 느낌이었다. 그는 매사 불평과 불만이 많았고 주변에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초인적인 노력으로 이뤄낸 기념비적인 성취에도 불안과 수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볼품없는 용모와 기형적인 체구 등 외모를 자조하는 신세타령 같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는데, 그런 컴플렉스가 준수하고 역동적인 인물 구현의 기폭제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천재의 인간적인 면모라고 느끼기에는 좀 애달프다. 그가 천장화 작업을 하는 기간 바티칸궁의 벽화 작업을 하던 라파엘로가 빼어난 외모와 훌륭한 인품으로 사람들을 매혹하며 일군의 팬덤을 형성하고 사교적이고 화려한 생활을 했던 것과 대비되어, 미켈란젤로의 고독하고 외골수 같은 면모는 더욱 부각된다. 당시 많은 미술가들이 자신의 후원자를 작품에 새겨 불멸화하는 데에 적극적이었지만,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천장화 작업을 하면서도 그런 시도보다는 신체 구조와 움직임의 정밀함에 골몰하며 새로운 미학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성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전에 다른 책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신체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려내기 위해 시체 해부까지 했다는 걸 읽고 깜짝 놀랐는데, 미켈란젤로 역시 시체를 해부한 경험이 있는 전문가였다고 한다. 르네상스 거장쯤 되면 당연한 과정인가 싶기도 하고, 오늘날처럼 인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밝혀지기 전이니 직접 부딪치는 방법을 택하는 게 탐구의 정도인가 싶기도 하지만,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인물을 그릴 때 항상 먼저 누드 상태를 완성한 후에 옷을 입히는 과정을 거칠 만큼 재현에 완벽을 기했고, 천장화는커녕 제대로 된 프레스코화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과감한 단축법을 구사해 관객의 시선에서 천장을 바라볼 때 인물의 입체감을 살리는 표현에 성공했다고 한다. 애초에는 거부하고 4년간 고통스러워하며 작업을 끝낸 시점의 미켈란젤로는 30대 중반에 불과했고, 그는 이후 반 세기를 더 살았다. 1536년에 시스티나 예배당에 돌아와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를 제단 벽에 그렸고, 말년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총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고 한다.

주인공 투탑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이지만, 책에는 정말 많은 당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물론 율리우스 2세 시기 로마를 방문해 큰 환대와 자신의 합법적 태생 인정서를 들고 돌아간 뒤 [우신예찬]을 통해 교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한 에라스무스, 교회 개혁 탄원을 위해 반체제 수도사로서 로마를 방문했다가 큰 환멸을 느꼈던 젊은 루터, 이름을 찾기 위해 다시 책장을 들춰볼 엄두가 안 나는 밀라노 볼로냐 베네치아 우르비노 페라라 피렌체 등등 이탈리아 지역 여러 공국의 군주들과 지배층이었던 종교인들이 그들이다. 분야의 장벽 때문에 한 권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인물들이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생동하는 덕분에, 수백 년 전 새로운 시공간을 추체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독서였다. 400쪽이 넘는 본문에 꽉 찬 이야기들 중에는 기억하고 싶은 인상적인 부분들이 참 많았는데, 헛된 욕심이므로 접기로 한다.

배낭 여행 중이던 2000년에 나 역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수많은 인파에 밀리며 본 적이 있었는데, 아는 바가 없는 관계로 별 감흥이 없었다. 서양미술사 강의 시간에 미켈란젤로에 대해 들으며 예전 <방구석 1열>에서 나왔던 [아거니 앤 엑스타시] 영상을 보게 됐는데, 책 말미에 가장 최근인 1989년에 완료된 복원 작업을 통해 드러난 미켈란젤로가 조수진을 이끈 정황과 함께 그에 대한 언급("1965년 어빙 스톤의 소설 [고뇌와 환희]를 각색한 영화에서 찰톤 헤스톤이 연기한, 비계 위에 드러누워 혼자 고군분투하는 미술가의 이미지를 도려내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이 잠시 나온다. 복원 작업을 통해 그을음을 벗은 벽화가 가려졌던 진실을 알려준 것처럼, 실존 인물에 덧입혀진 신화의 빛을 걷어낸다고 그 예술혼의 위대함과 위상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종횡무진 방대한 이야기들이어서 뼈대를 제외하면 곧 잊히겠지만, 인물과 사건 못지 않게 시대에 대한 호기심과 신정일치 세계를 살아간 대중에 대한 상상력을 증폭시켜준 고마운 독서였다. 


로스 킹•신영화(옮긴 이)
2007.4.27. 은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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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