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3. 10. 23. 23:55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둠이 드리운 게르 안, 아들을 걱정하는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무속인 그리고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는 몇 사람의 주술 의례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백발의 노인과 이마를 맞대고 접신한 영의 메시지를 전하던 이가 가면을 벗자 해사한 얼굴이 드러난다. 무당이자 고등학생인 17살의 제, 그의 일상은 울란바토르의 학교생활과 지역 사회의 출장 의례로 채워진다. 평소 여느 남매들과 다를 바 없는 관계인 누나도 제가 의례를 행할 때만큼은 경건하게 보조 역할을 수행한다.   
 
제가 사는 곳은 울란바토르 교외의 시골 마을, 제와 누나는 작은 방을 함께 쓴다. 크지 않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각자 잠을 청하는 남매의 밤은 제가 연주하는 주즈하프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말고는 고요하다. 말수가 별로 없고 평온한 표정의 제는 학교에서 그럭저럭 모범생이다. 남녀 합반인 교실은 성적 호기심 가득한 사춘기 남학생들의 짓궂은 장난, 억압적인 교사의 고함과 호통으로 소란하지만 제는 적당한 존재감으로 풍경처럼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말을 앞두고 지인의 부탁이라는 엄마의 당부에 출장 의례를 간 곳에서 제는 또래인 마랄라를 만난다. 딸의 심장 수술을 앞둔 엄마가 청한 소년 무당을 마지못해 마주한 마랄라는, 의례를 마친 후 제의 영적 능력을 의심하며 비수를 날리지만 제는 그런 마랄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교실에서 마랄라의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교사에게 걸려 휴대폰을 압수당하기도 하고, 혼자만의 상상과 욕망에 빠져들기도 하던 제는 인스타 게시물에서 힌트를 얻어 하리보를 사들고 수술을 앞둔 마랄라의 병원에 찾아간다.  
 
금세 친구가 된 마랄라와 제는 울란바토르 도심의 거리를 함께 걷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눈다. 새로 지어지는 울란바토르의 높은 건물과 아파트를 보며 현대적 삶을 꿈꾸는 마랄라는 수술한 심장이 나으면 한국에 가고 싶다. 이주노동자로 한국에서 일하는 아빠가 보내주는 돈 덕분에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지만, 아빠를 배신하고 남자를 끌어들이는 엄마와 답답한 몽골을 떠나고 싶다. 당차고 주관이 뚜렷한 마랄라와 함께하며 백화점이며 클럽을 드나들면서 도시적 삶의 양식과 일탈에 휩쓸리지만, 제는 여전히 동물과 자연과 함께하는 시골 생활로 마음이 향한다.  
 
시장에서 전통의상을 파는 엄마,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 그리고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자신의 남다른 운명은 제에게 벗어나고 싶은 조건이 아니었다. 마랄라를 만나며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급속한 변화에 휩쓸리던 제는 어느 날 클럽의 거대한 소음과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즈음의 출장 의례에서 전에 없었던 영적 능력의 이상을 감지한 제에게, 적응하기 어려운 도시화와 지향점이 다른 사랑은 아직은 건너가기 어려운 먼 세계인지도 모른다. 
 
문화적 충격과 사랑의 혼란으로 방황하는 제의 학교생활은 겨울을 맞아 졸업을 향해간다. 여느 날처럼 고압적이고 모욕적인 교사의 막말과 짐승 취급에 학생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다함께 짐승 소리를 내며 일격을 가한다. 사춘기를 통과하며 제 나름 성장한 학생들의 얼굴은 찰나의 자존감과 해방감으로 빛난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글로벌 세계와 과도기적인 물리적‧사회적 환경을 동시에 살아가는 경계인의 분열감과 불안 같은 것들, 알게 모르게 이들을 지배하던 무거움을 잠시나마 스스로 제거한 느낌이었을까. 운명이었든 열망이었든 그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제에게도 이 순간은 하나의 분기점이 된다. 
 
아들을 걱정하며 의식을 청했던 옆집 할아버지는 제가 찾아가 깊은 속내를 에둘러 꺼내기도 했던 사이다. 알콜릭으로 직장에서 위기에 처했던 아들은 결국 해고되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염려를 현실로 만들었다. “아들아 너는 내 온 마음을 다해 얻은 아이란다. 백 살을 살고 백 번의 가을을 맞이하거라”, 마을길을 걷던 제는 할아버지의 영이 자신을 스쳐가는 것을 목도한다. 간절한 바람을 남기고 떠난 할아버지의 마음을 받아 실의에 빠진 아들을 위로하는 제의 모습은, 화려한 가면도 치렁한 의상도 없지만 첫 장면처럼 진심과 위엄을 담은 영매처럼 보인다. 
 
 
작년 부국제의 [세일즈 걸]에 이어 두 번째 본 몽골 영화, 애초 같은 시간대에 왕빙 감독의 [청춘(봄)]을 예매했는데 전날 시간표를 다시 살피다가 앞 시간 상영과 GV 이후 영화 시작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 급히 바꿨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지만 가급적 GV가 있는 영화를 보고 싶었고 [세일즈 걸]의 괜찮았던 기억으로, 몽골 영화를 한 번 더 보기로 선택. 앞서 본 영화의 주인공이 18살의 이스라엘 소년이었던 터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년배의 이야기라는 면에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제는 어떤 영화든 젊은 세대가 주인공이라면 휴대폰과 sns는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이지만, 온라인으로 연결된 세계의 동시성과 동질성과 대비되는 오프라인 환경과 삶의 판이한 모습은 그래서 더욱 크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제의 주술뿐 아니라 영화에는 태양, 하늘, 대지 등 온 자연에 모두의 안녕을 비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자주 나왔다. 일상어와는 다른 결의 의고적인 말투에 담긴 축원의 말들은 도시화와 현대화에 밀려 사라진 인간의 순한 마음을 표상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전통에 충실한 생활에 고루함을 느끼고 출장 의례 동행을 거부했던 누나가 미혼모가 된 후 오히려 안정감을 얻은 듯 보이고 가족 안에 녹아든 듯이 보이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개발과 발전이 가져오는 구획과 편견으로부터 오히려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와 질서 같은 것들이 부각되는 느낌이랄까. 너른 개활지를 사이에 둔, 멀리 높은 건물들이 빽빽한 울란바토르의 도심과 마을의 대비가 근대와 현대, 과거와 미래의 상징처럼도 보였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미덕은 무엇이 더 낫거나 좋다는 비교가 무의미한 담담한 포착과 응시가 아닐까 싶다. 
 
GV에는 감독과 제 역할의 배우가 참여했는데, 영화를 보며 느꼈던 모든 궁금증을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영화만 봤다면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에도 각종 점집과 무속인들이 존재하지만 직접 찾아가본 적이 없고 영화만큼 일상에 깊이 뿌리박힌 문화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거나 험한 일이 닥쳤을 때 동네 무당을 찾아가거나 부르는 모습, 그 무당이 평일에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는 평범한 학생이라는 점 등이 신기했는데, 감독이 스물다섯일 때 엄마에게 이끌려 간 곳에서 소년 무당을 만난 경험으로부터 시작된 영화라고 한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흡인력이 크게 느껴졌던 제 역할의 배우는, 어리지만 샤먼으로서의 신뢰감을 줄 수 있는 마스크와 분위기의 연기자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결국 방송국 촬영 스태프로 일하던 지금의 배우를 추천받아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데시벨이 낮고 고요한 영화였지만 늘어진다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체념이나 포기는 아닌 담담한 운명의 수용, 신체반응이 올 만큼 급격한 감정의 파고와 정신적 충격의 정적인 내면화, 눈빛과 표정의 미세한 변화의 감정 표현 같은 주인공의 연기 덕이 컸다고 느꼈는데, 연기 경험이 처음인 배우였다는 게 신기했다. 캐스팅되었을 때 어차피 잃을 게 없으니 해보자는 마음이었다는데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오리종티 부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고 하니, 마땅하고 축하합니다.
 
 
10/9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2관
 
 
 

 
 
[City of Wind]
 
Director: PUREV-OCHIR Lkhagvadulam 퓨레브-오기어 카비주램
Cast: Tergel BOLD-ERDENE, Nomin-Erdene ARIUNBYAMBA, Anu-Ujin TSERMAA, Bulgan CHULUUNBAT, Ganzorig TSETSGEE
국가/지역France/Mongolia/Portugal/Netherlands/Germany/Qatar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103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17살 제는 울란바토르의 근대적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지역 공동체의 샤먼으로서 조상의 영혼과 교감하며 전통적 삶을 이어 나간다. 도시적 삶과 전통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누나와 달리 제는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듯 보인다. 수술을 앞둔 또래 소녀 마랄라를 위해 주술 의식을 하러 간 제는 반항적이면서 불안정해 보이는 마랄라에게 매력을 느끼고, 새로운 욕망이 싹튼다. 영화는 성인의 문턱에 들어선, 변화하는 몽골의 전통과 현대적 삶의 경계에 선 10대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개인의 욕망과 공동체의 의무, 전통과 현대, 도시와 시골, 현실적 삶과 영적인 삶의 가치와 경계에 대해 질문한다. 이 영화의 10대 주인공들이 직면한 불안과 혼란, 외로움의 풍경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오늘날 몽골 젊은이들의 내면 풍경이다. (홍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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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나어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