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걸음걸이2023. 10. 23. 23:37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폐허가 된 건물 안에 극도로 긴장한 표정의 앳된 군인이 있다. 무리와 떨어진 듯 혼자인 그는 건물 밖으로 나와 정적이 감도는 건물 사이를 이동한다.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널부러진 시체들을 지나고, 마주치자 겁에 질려 살려달라 애원하는 민간인에게 총을 겨눈다. 쓰러져 있는 운전자를 내던지고 올라탄 차를 운전해 질주하다가, 철조망에 가로막히자 차를 버리고 달리기 시작한다. 

 

숨 가쁜 달리기 끝에 시골 마을에 당도하자 금세 변하는 눈빛, 밭의 수박을 통째로 쪼개 먹으며 달려오는 강아지를 반갑게 맞은 군인은 집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집, 상한 음식들, 고요하고 불안한 내부 공기에 조심스레 움직이던 그는 샤워를 하다가 밖에서 나는 소리를 감지한다. 문을 두드리고 집 앞을 서성이는 군인들을 블라인드 틈으로 발견하고, 반대편으로 몰래 나와 또 달리기 시작한다.

 

군복에 총까지 메고 도망친 군인이 도착한 곳은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는 도심의 한 레스토랑 주방, 부주방장으로 일하는 시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사랑에 빠진 18살 소년으로 돌아온다. 바다에 몸을 담그고 긴장을 풀던 슐라미는 해수욕을 즐기며 군인의 충정을 치켜세우는 부부와 인사하고, 그들이 물에 들어간 사이 남자의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난다. 

 

건물 옆 후미진 곳에 총을 숨기고 일상복 차림의 손님을 가장해 시리의 레스토랑에 들어간 슐라미는 음식을 시켜 허기를 채우고, 사랑을 담아 저녁 데이트를 청하는 쪽지를 시리에게 전달하며 한껏 들떴다. 하지만 졸지에 옷과 휴대폰을 도둑맞은 부부가 유리창 밖에서 그를 발견하고, 다시 도망친 슐라미는 할머니 집으로 피신한다. 

 

슐라미의 아버지는 일하던 중 근처의 폭격에 충격을 받아 입원했고 어머니는 간병을 위해 병원에 함께 있다. 보병대로 입대해 가자지구 작전에 투입된 아들의 출현, 반나절 사이 급박하게 전장과 일상을 오간 슐라미의 사연을 관객은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된다. 슐라미는 곧 캐나다로 떠나는 사랑하는 여자 친구 시리를 잡기 위해 탈영했고, 부대에서는 납치로 추정해 집으로 찾아가고 어머니에게도 연락한 것이다.

 

아들이 납치되었다는 부대 지휘관의 연락과 눈앞에 나타난 아들의 탈영 고백, 어머니는 자수를 강권하지만 슐라미에게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시리를 만나 자신과 함께하기를 설득하는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퇴근한 시리와 그의 집에 간 슐라미, 뭐라도 해서 이스라엘에서 함께 살아가자는 속마음을 꺼내지만 고대했던 하룻밤과 훗날의 결혼 약속은 가자지구에서의 병사 납치 뉴스로 물거품이 된다.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자수를 결심한 슐라미는 길에서 해변의 부부를 마주치고 도둑놈으로 몰려 시민들에게 봉변을 당한다. 아버지의 예비군복을 입고 자수하기 위해 들른 집에서 깜빡 잠이 든 슐라미는, 바람대로 무사히 자수하고 부모의 얼굴에 환히 웃음이 피어오르는 꿈을 꾼다. 하지만 현실은 신원이 밝혀진 납치병에 관한 취재를 위해 집 앞에 찾아와 진을 치고 있는 방송국 제작진들을 피해 다시 도망가는 것, 슐라미는 탈영 직후 부대 지휘관들이 찾아왔을 때처럼 다시 도주한다. 

 

긴장과 불안, 멘붕과 피로감에 범벅된 슐라미는 다시 차를 훔쳐 타고 질주하지만 곧 도로의 구조물을 들이받고 만다. 상처와 피로 얼룩진 채 차에서 빠져나온 기진맥진 슐라미 그리고 아무 일 없는 듯 차들이 오가는 밤의 도로, 반대편에서 퀵보드를 타고 오던 청년이 잠시 그를 살피다 지나간다. 상점에 들어가 음료를 집어든 슐라미는 가게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납치병 신원 공개 뉴스를 보고 종업원에게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아무 관심이 없다. 

 

자포자기 상태로 달려오던 트럭을 정면으로 막아서는 슐라미, 그를 피해 급히 핸들을 꺾느라 사고를 내고 멈춰선 트럭 기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폭행을 가한다. 피투성이가 된 채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된 슐라미,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뉴스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납치병' 슐라미는 그렇게 다른 현실로 돌아간다. 그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출혈뿐이다. 

 

 

영화 초반 전모를 감춘 채 전개되는 극도의 긴장 상황과 이어지는 다양한 일상의 풍경들이 의아하게 다가왔다. 연속된 시간선상, 분절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의 극명한 온도차가 절로 몰입감을 높였다. 평범한 일상복과 무장한 군복 차림의 뒤섞임에 위화감이 없고, 언제 재개될지 모르는 공습의 위협이 상존하며, 먼 하늘에 반짝이는 조명탄과 지금 여기 파티의 불빛이 공존하는. 불시의 포격과 함께 전시와 평시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저런 것일까 싶어졌다. 

 

줄곧 슐라미를 따라가는 카메라는 입은 옷과 자리하는 장소와 처하는 상황에 따라,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람을 보여준다. 벌벌 떠는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누는, 가까스로 집에 닿아 달려오는 반려견 보비를 마주하는, 레스토랑에 찾아가 시리를 바라보는, 인지능력이 감퇴한 할머니 집에 찾아가 어린 손자로서 보살핌을 받는, 상황이 꼬이고 궁지에 몰리며 좌충우돌하는…. 하루 동안 겪을 수 있는 감정과 경험의 극단을 시험당하는 듯한 슐라미를 통해, 영화는 이스라엘의 현실과 더불어 ‘자연스러운 일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적들의 공격에 대한 대응은 군인들만의 몫인 듯 나머지 시민들은 술 파티와 해수욕을 즐기면서 그들을 국가를 지키는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모두가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징병제 국가이니 누구나 경험하는 통과의례이자 숙명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전장을 벗어난 18살 소년 슐라미의 불가능한 바람과 그를 둘러싼 거대한 소동 그리고 상처 입은 그가 거리에서 마주하는 이들의 무감함과 무신경함은 속도감 있는 전개와 호쾌한 음악, 블랙코미디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무게감을 지우기에 역부족이었다.

 

부러 GV가 있는 작품을 찾아 예매한 올해 부국제 첫 영화였는데 시작 전 취소됐다는 걸 알게 됐고, 프로그래머가 나와서 대니 로젠버그 감독의 상황과 편지를 전했다. 전날 가족들이 있는 텔아비브로 돌아갔다는 감독은 기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라 부산에 도착한 직후 하마스의 공습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편지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젊은 세대의 꿈과 미래에 드리운 그늘 그리고 현실은 영화보다 무겁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며 스크린에 재현되는 부조리와 블랙유머는 오히려 낙관적인 상상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면전 뉴스를 볼 때마다 영화와 감독이 떠오른다.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감독과 가족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10/9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The Vanishing Soldier]

Director: Dani ROSENBERG 대니 로젠버그
Cast: Ido TAKO, Mika REISS
국가/지역Israel 제작연도2023 러닝타임98min 상영포맷 DCP 컬러Color

Program Note
가자 지구의 작전 중 뜻하지 않게 탈영한 병사의 이야기다. 텔아비브에 사는 연인과 부모를 찾아가는 순진한 얼굴의 18살 청년은 혼란스럽고 뜨거운 하루를 보낸다.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모른다면 마찬가지의 어지러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아랍인들의 시체가 곳곳에 너부러져 있는 가자의 현실과 반대로, 텔아비브의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의 테러를 규탄한다. 총을 멘 병사가 거리를 활보하는데도, 뉴스에선 그가 적에 의해 납치됐다는 오보가 종일 흘러나온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에서, 영화는 ‘눈을 감고 생각했을 때, 과연 이스라엘이 머물고 싶은 곳인가?’라고 질문한다. 인물과 함께 질주하는 음악이 압권이다. 숨 가쁜 드럼의 비트에 맞춰 임프로비제이션 하듯 전개되는 연주는 인물의 심장을 박동기처럼 두드린다. (이용철)  

https://www.biff.kr/kor/html/program/prog_view.asp?idx=68598&c_idx=390&sp_idx=0&QueryStep=2

'빛의걸음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키리에의 노래]  (0) 2023.10.24
[바람의 도시]  (0) 2023.10.23
[허공에의 질주]  (0) 2022.11.01
[애프터 미투]  (0) 2022.10.14
[티켓 투 파라다이스]  (0) 2022.10.14
Posted by 나어릴때